안동 아기산 산행 20180516 수
안동 아기산 산행
20180516 수 한마음
14:10 수곡교 동쪽 끝단, 와룡산에서 이동 시간이 50분 가까이 경과했다.
14:14 등산로입구
뻐꾹채, 백선, 고들빼기, 조개나물, 큰꽃으아리, 노루발풀, 2652, 둥굴레, 2662,
14:41 '두루미정상(455m)'이라는 표지가 붙었는데, 나의 폰으로는 414m이고, 다른 이들도 비슷하며 지도상의 두룹미봉의 위치가 아니다.
우로는 봉황사가 산기슭에 보이고, 좌로는 임하호가 보인다.
기린초, 2684, 1716천문동, 2722졸방제비꽃
14:49 두루미봉정상(455m), 지도상의 두루미봉 위치, 벤취가 놓여 있고, 119의 '아기산05' 위치표지가 있다.
14:58 에재 [정상1.2, 봉황사1.2, 두루미0.5, 주차장1.8]
15:12 미녀목
15:25 큰꽃으아리, 둥굴레
15:29~34 아기산(591m), 삼각점, 벤취, 기린초
15:36 [정상0.1, 봉황사1.6↓, 덕강재1.6]
15:54 은난초 군락
15:57 조개나물, 부도탑군
16:00 봉황사극락전, 대웅전(경북유형문화재141호)2826
불두 없는 좌불, 아기산봉황사사적비(대웅전 옆에),람덕루
지칭개, 광대수염, 가시엉겅퀴, 꽃마리, 불두화, 고마리,
__수영, 고광나무, 찔레, 고들빼기, 씀바귀,
16:25 수애당 등산로입구
16:26 무실정려각(2910)
16:28 기봉선생구려명
16:29 작약(함박꽃), 수애당
16:33 기양서당
16:39 전주류씨무실종택,기봉구려, 수애당
16:42 주차장/12분 늦게 도착했는데 후식은 거의 끝났다.
아기산(鵝岐山) 유래
태백산 지맥인 일월산이 뻗어내려 여기 남쪽에 우뚝 솟은 아기산은 임동면에서 가장 높은 면의 진산(鎭山)이다.
산의 이름은 한자로 鵝岐山, 또는 峨岐山으로도 쓰이며 한발이 심할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영험이 많아 반드시 비를 내렸다고 한다.
산자락 북에는 봉황사(鳳凰寺), 옛 황산사(黃山寺)란 신라의 유명한 고찰과 무실마을인 전주류씨 집성촌이 있다.
조선조에 이조참판 류복기 선생은 이산을 호로 삼아 기봉(岐峰)이라 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은 이곳을 무실마을의 당산으로 모시고 정월 보름날 아기당(鵝岐堂)에서 고사를 올린다.
유시연 [柳時淵]
자 박여(璞汝), 호 성남(星南)
출생 - 사망 1873년(고종 10) ~ 1914년
1873(고종 10)∼1914.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시연(時然). 자는 박여(璞汝), 호는 성남(星南). 경상북도 안동 출신.
1882년 향리의 대평학숙(大坪學塾)에서 유연각(柳淵覺)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6년 안동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의 막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유선봉(柳先鋒)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안동의진이 해산한 뒤, 영남지방으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의진에 가담하였다.
1906년 봄 경주 분황사에서 열읍(列邑)의 의병대표들과 회맹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어 진보·영덕·평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다. 1907년 한국군 강제해산 후 이강년(李康秊)이 격서를 보내와 함께 활약할 것을 요청하자, 군사 수십명을 거느리고 삼척방면으로 가서 이강년을 만났다.
이 때 친일파 박두일(朴斗日)의 계략에 빠져 군졸들이 흩어지자, 격분하여 울진십이령(蔚珍十二嶺)에서 박두일을 사살하였다. 이어 영양·청송·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전과를 올렸다. 1908년 부하 57명을 거느리고 의성 갈곡동에서 왜병을 습격하여 성과를 올리고 영양 북면에 잠복하였다.
1911년 8월만주로 망명하여 이상희(李象羲)·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남북만주일대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에 최적지임을 깨닫고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13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5월 영주 반구왜경소(盤邱倭警所)에 붙잡혔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14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대웅전의 전면
사적비가 있는 측면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는 뒷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디.
위의 사진을 조금 밝게 해서 보는데...
봉황사 대웅전(鳳凰寺 大雄殿)
경상북도 윻ㅇ문화재 제141호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이 건물은 원래 황산사의 대웅전이었으나 언제 개명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대웅전과 요사채 산신각이 있으나 예전에는 극락전, 범종각, 만세루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선덕여왕 13(644)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북쪽 텃밭에 원래의 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경내의 건물2동은 후대에 옮겨 세운 것으로 북향의 급경사지에 세워져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산곡간의 법당으로는 비교적 큰 편이다.
내부의 3칸 후면 벽에 불상을 설치하였다.
기둥의 앞면과 뒷면이 다른 것이 특이하다.
전설에 의하면 대웅전의 단청은 봉황이 하였다고 한다.
단청을 할 때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고 단청을 하였으나 전면을 마친 후 뒷면을 하는데 사람들이 몰래 쳐다보자 일을 다 마치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현재 후면은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면 좌측에는 봉황의 알, 우측은 불두가 없는 좌불이 있는데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이 좌불이 산 속에...
이 비석은 대운전 건물의 좌측(전면에서 보았을 때)에 있다.
이 비석의 이름을 보고 봉황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위의 큰 글씨 9자는 '아기산봉황사사적비'
무실 정려각(務實 旌閭閣)
경북민속문화제 제48호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조선 인조때 류성(柳城)의 부인인 의성김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각
김씨는 청계 김진의 딸이며 학봉 김성일의 여동생으로 24세에 남편이 죽자 손수 머리를 자르고 3년간 무덤을 지키다가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그 후 인제 13년(1635)에 나라에서 열녀비를 내렸다.
이 정려각은 단칸이며 사각기둥을 세운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단청을 하지 않고 별다른 장식이 없어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기양서당[岐陽書堂]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당.
기봉 유복기 선생과 회헌 유의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시도민속문화재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호 / 1979년 12월 18일 지정
1979년 12월 18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유의손(柳義孫)과 유복기(柳復起:1555∼1617)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전주유씨 수곡파의 세덕사(世德舍)이다. 앞쪽으로 임하댐이 보인다. 원래는 안동군 무실 남쪽 산록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에 이건·보수하였다.
처음에는 유복기가 1615년(광해군 7) 서재로 건립하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으나 1716년(숙종 42)에 후손들이 서당으로 중창하였다. 그후 사당인 추원사(追遠祠)를 세워 1780년(정조 4) 유복기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806년(순조 6)에 유의손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하였다. 매년 정월 6일에 사당에 참배하며 매년 3월과 9월 첫 정일(丁日)에 향사를 치른다.
추원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당인 역락당(亦樂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2칸의 방이 딸려 있다. 역락이라는 강당명은 《논어》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강당에 딸린 양쪽 방에도 각각 ‘숭덕재’와 ‘광업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유의손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자는 효숙(孝叔), 호는 회헌 또는 농암(聾巖)이며, 세종 때 이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냈다. 유복기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성서, 호는 기봉으로,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김해(金垓)·배용길(裵容吉) 등과 함께 예천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다.
임하호
기봉구려(岐峰舊廬) 16세기 고가(古家) 전주류씨 무실종택(全州柳氏 務實宗宅)
수애당[水涯堂]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는 수애 류진걸(柳震杰)이 1939년에 건립한 사가(私家)로서 1985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용계로 1714-11(수곡리 470-44)
수애 류진걸(柳震杰)이 지은 사가(私家)이며 그의 호를 따라 당호를 수애당이라 했으며 현재 후손 류필우가 소유, 관리한다.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침(正寢)은 ‘一’자형 평면 구조로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고방(庫房)은 ‘ㄱ’자형 평면 구조로 정면 10칸 규모이고, 대문은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이다.
1939년에 지은 이 가옥의 목재는 모두 춘양목(春陽木)으로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선 말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원래 안동군 임동면 수곡동 612번지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역으로 편입되자 1987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하였는데, 경사지 위에 있던 것을 평지에 다시 세움으로써 정침이 원래보다 약 2~3m 낮아졌다고 한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