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유학산 산행 20171012 목
칠곡 유학산 산행
20171012 목 한마음
비 내리고 구름으로 덮혀 조망이 없는 날
코스 : 팥재-도봉사- HP-유학산정상/정자-신선대-다부동전적기념관
1041 도봉사입구
1108 HP[도봉사0.64, 유학정 0.14]
1113 839고지탈환전안내판,유학정, 유학산정상(839m)
1125 [←유학정 0.2, ↓도봉사0.6,→다부리4.5]
1129 폐헬기장
1203 837고지[←유학산,↓장현고개]
1203 837고지탈환전안내판 [←820고지,674고지→]
1308 삼각점,태극기
1329 674고지탈환전안내판 [837고지 ←1.24, 다부동전적기념관→ 1.56]
1353 송전철탑
1411 임도입구
1420 전적기념관도착, 산행종료
6.25의 격전지 다부동, 그 중심에 유학산이 있다.
고지마다 탈환전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비 때문에 조망이 좋지 않아 길만 익히는 정도였기에 미련이 남는다.
며칠 전에 일기 예보에 비소식이 있었는데 은근히 개이기를 바라면서도 차라리 비가 치적치적 내려야 6.25의 간접체험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는데 기어이 1~4mm,오후에는 5~9mm, 예보대로 뿌리는 것 같았다.
조망도 오전 시간대에 오르면서 잠시 본 게 전부였던 것이다.
등산로의 중간중간 구덩이가 있는데 아마도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인 듯하다.
피아간에 3만에 육박하는 전사자가 발생했으니 얼마나 처절한 현장이었을까.
도봉사 뒤편으로 쉰질바위라는 병풍처럼 생긴 암벽이 있어 그 쪽 방향으로 조망이 뛰어나다.
그런데 볼 수 없어 ......
지난 번에 왔던 숲데미산, 봉두암산은 저 아래 멀찌기 물러나 있고, 바로 건너편에 황학산이 보인다.
이 능선을 따라 가면 대구 팔공산으로 갈 수 있다면, 피아간에 이 곳이 사수할만한 거점이었을 것이다.
능선에 바위들이 제법 있어 엄폐공간이 제법 있는 것 같다.
정상에서 약 1.5km 지점에서 우측의 능선 방향으로 시그널이 있어 40m 정도 내려갔을까, 발자국도 없고 GPS 트랙도 벗어나서 도로 올라왔다.
여기서는 지체하는 시간 포함해서 12분이 소요되었다.
여기서 약 300m 정도 더 갔을 때, 약 2시간 정도 산행 시간이 경과했을 때 또 한 번 경로를 이탈했다.
길이 좋았고 방향도 거의 직선이다.
그 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산하여 버스가 데리고 왔다고 한다.
나는 500m까지 내려가서야 방향이 틀린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 왔다.
그 시간이 30분이 소요되었다.
오늘 산행 시간 중에 42분을 버린 셈이다.
나중에는 뒷사람과 적당히 맞추느라 속도도 느려졌다.
전체 계산에서 1.1km/40분은 제외해도 괜찮을 것이다.
다음에 이 코스를 다시 온다면 두 번째 지점에서 꼭 유의해야할 곳이다.
이 시간이었으면 전적기념관을 관람할 시간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관람을 못하고 돌아온 게 아쉽다.
다음에 맑은 날에 대중교통으로 다시 한 번 와야할 곳으로 남겨 둔다.
이 지도의 역순이다. 들머리의 고도가 높아 쉬운 선택이다.
네이버 지도의 트랙을 활용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원본크기를 보려면 클릭
1950.8.13~8.23
김책에게 내린 명령이 성공했을 때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
유학산에 얽힌 전설
가산면 학산리의 유학산은 학(鶴)이 노닐 정도로 기암과 산림이 울창하다.
주봉(主峰) 유학산과 소학(巢鶴)ㆍ황학(黃鶴)의 3학산(鶴山)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어떤 문중에서, 유학산에 있던 묘(墓)를 이전(移轉)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전날 밤 묘주의 꿈에 백발 노인이 현몽하여 묘를 옮기면 안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이튿날 파묘하자, 학 세마리가 묘에서 날아올라, 맞은편 황학산과 마을 서편의 소학산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유학산 정상부위에는, 마당재 옆에 우물이 있고, 다래가 많이 나는 다래바위골이 있다.
지금도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는 이 우물은 옛날에는 명주실 두 타래를 늘여 뜨려도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고 한다.
유학산 중허리에는 '빈대절'과 '가산절' 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빈대절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승려가 빈대절터에 암자를 지어 불도를 닦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암자엔 빈대가 너무 많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승려는 몇 년 동안 암자를 비우면, 빈대가 없어지리라 생각하고 암자를 떠났다.
몇 년후 다시 돌아와 보니 암자에 빈대가 한 마리도 없고 전에 없었던 구리 빛깔 기둥이 서 있었다.
승려가 그 기둥을 짚어 보자, 그만 기둥이 무너지면서 빈대들이 쏟아져 나와, 결국 그 승려는 빈대 떼에 의해 극락으로 갔다고 한다.
마을에는 천년 넘은 고목으로 다섯 아름 되는 은행(銀杏)나무가 있는데, 신라(新羅) 때는 사찰 경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은행나무는 신기하게도 국가 환난(患難)이 있을 때마다 꼭 울었다고 한다.
청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그리고 6.25동란 직전에도 며칠동안 울었다고 한다.
마치 탈곡기 소리와 같이 "으-응, 으-응"하며 울었는데, 은행나무에 등을 대면 나무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많은 열매를 맺었으나 1973년 겨울에 아이들이 놀다가 밑둥치 구멍에 불을 질러 삽시간에 타버리고 밑둥치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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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총(義犬塚)
옛날, 석적읍 어느 마을에 김생원이 살고 있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날, 강아지 한마리가 추위에 떨며 자기 집으로 기어 들어왔다. 원래 짐승을 좋아하던 김생원은, 측은한 마음으로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며 따뜻하게 보살폈다.
강아지는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찾으러 오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김생원은 그대로 자기 집에서 기르게 되었다.\이 개는, 김생원의 귀여움을 받으며 잘 자라서, 삽사리가 되었다. 삽사리는 무척이나 영리하여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주인을 알아 보았으며, 항상 김생원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날, 강 건넛마을에 잔치 갔던 김생원은 그날 따라 술이 좀 과해, 돌아오는 도중 강가 잔디밭에 쓰러져 그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취중에 피우던 담뱃대의 불이, 바싹 마른 잔디밭에 붙어, 그 주위로 번져갔다. 김생원 옆에 앉아 주인이 깨기를 기다리던 삽사리는, 볼을 문지르며 발로 주인을 흔들었으나, 김생원은 깊은 잠에서 깨어 날 줄 몰랐다.
불길이 점점 김생원에게 가까워지자, 삽사리는 번개같이 강으로 달려가 온 몸에 물을 함빡 적셔와서, 불이 타 들어오는 주인의 주위를 뒹굴었다.
강과 언덕을 수없이 뛰어다니며 제몸에 물을 적셔와 주인을 지킨 삽사리는, 화기를 먹은데다 지칠대로 지쳐, 그만 주인 옆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얼마후 찬 기운을 느끼고 잠을 깬 김생원은, 자기 주위만 안 탄 잔디밭에 옷이 젖어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삽사리가 자기를 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김생원은 자기를 살리려다 대신 죽어간 삽사리를, 그 곳에 정성껏 묻어 주었으며, 사람들은 삽사리의 충직하고 깊은 의리를 기려, 그 무덤을 '의견총(義犬塚)'이라 불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일대에 밭을 일구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을 개들이 매일같이 의견총 자리에 모여 놀아 농사가 되지 않으므로, 그곳에 다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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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바위
가산산성은, 성문과 성곽이 남아 있어 옛 산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칠곡군 가산면은 옛날의 산성으로서 아직도 성문과 성곽이 그대로 남아 옛 산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산성 서쪽편 해발 845m에 있는, 80여평의 넓은 바위를 '가산바위'라 한다.
철우와 철마
가산바위 중심부의 커다란 구멍속에는, 쇠로 만든 소와 말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중 도선(827 ~ 898)이 산천을 편력하면서, 탑을 쌓거나 철상을 땅에 묻어 지기를 다스렸다 하는데, 가산바위 굴에는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어 지기를 눌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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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봉(王山峯)과 수기석(竪旗石)
'왕산봉'은, 지천면 송정리 뒷산으로 연화 1리와 경계하고 있다.
서기 928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팔공산에서 격전중 전세가 불리하자 대장 신숭겸과 갑옷을 바꾸어 입고 달아나, 왕산봉에서 전열을 재정비 승전하였다 한다.
왕건 태조가 유진한 곳이라 하여 '왕건봉'이라고도 하며, 깃발을 꽂은 돌을 '수기석', 그 골짜기를 기봉골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