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내장산 이안사적기
조선왕조실록 내장산 이안사적기
朝鮮王朝實錄 內藏山 移安事績記
때는 서기 1592년 壬辰4월 부산으로 침입한 왜적이 전주로 육박해 오자 全州史庫의 王朝實錄을 보전하는 일이 급급하였다.
이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광(李洸)은 도사 최철견(都事 崔鐵堅), 삼례제방 윤주길(參禮祭訪 尹走吉), 경기전 참봉 오희길(慶基殿 參奉 吳希吉), 유인(柳認)과 숙의한 끝에 정읍현 내장산으로 移安키로 하고 이 일을 태인현(泰仁縣)의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으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안의, 손홍록은 가동 30여명을 이끌고 전주사고(全州史庫)로 들어가 6월 22일 소장 서적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기니 실록본기(實錄本記)가 30여타(馱)요, 고려사기문 등이 20여 타(馱)였다.
이어서 7월 1일에는 조선태조수용(睟容)을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봉안하였다.
그후 7월 14일에 실록을 비래암(비래암)으로 옮기고 9월18일에 수용(睟容)도 이곳으로 옮겼다.
이때 무사 김홍무(武士 金弘武), 승장 희묵(僧將 希默)이 이끄는 승군 일천여명이 주야로 호위했다.
이렇게 이안(移安)된 수용(睟容)과 실록(實錄)은 이곳 내장산에서 370일 동안 봉안되었는데, 안의, 손홍록이 함께 수직(守直)하기를 53일, 안의가 174일, 손홍록이 143일 각각 단독으로 지켰다.
그 이듬해인 1593년 수용(睟容)과 실록(實錄)을 행궁(行宮)으로 옮기라는 조정의 명이 있어 7월 9일 정읍현감 유탁(井邑縣監 兪卓)이 부행차사원(部行差使員)이 되고 경기전참봉 구정려, 이도길(慶基殿參奉 仇廷呂, 李道吉)과 안의, 손홍록, 희묵이 배행하여 정읍을 출발하였다.
일행은 태인, 익산, 정산을 거쳐 7월 19일 아산에 이르러 충청관찰사 이산보(忠淸觀察使 李山甫)에게 넘겨주고 돌아왔다.
그 뒤 실록은 해주(海州)로 옮겨졌다.
1596년 병인 9월 20일에 안의, 손홍록은 아산(牙山)으로 가서 수복 한춘(守僕 韓春)과 함께 수용(睟容)을 강화도로 이안하였는데 안의는 병으로 귀가하고 손홍록은 다음해 1월에 수용(睟容)을 받들고 안주(安州)로 들어갔다.
그리고 해주의 실록은 이곳으로 옮겼다.
손홍록은 다시 부노(父老)들과 상의하여 수용(睟容)과 실록(實錄)을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에 봉안하고 수직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주사고의 왕조실록 원본이 오늘에 유일하게 보전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안의, 손홍록 두 의사(義士)의 큰 공이라 하겠다.
1991년 신미(辛未) 9월
수용(睟容)[명사] 온화하고 자상한 용모라는 뜻으로, ‘어진’(御眞)을 달리 이르는 말.
임진왜란 때였다. 왜놈이 금산에 쳐들어오자 손홍록과 안의라는 두 선비가 머슴 수십명을 이끌고 전주 경기전(慶基殿)으로 달려가서 그곳을 지키는 참봉인 오희길과 함께 이태조의 영정과 왕조실록 등의 사고본(史庫本)을 모시고 이 산 금선폭포 가는 길에 있는 용굴암의 용굴에다가 1년간 꼭꼭 숨겨 놓았다. 그래서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 사고가 불타 버렸지만 유일하게 전주본만이 전화를 면하여 오늘날까지 전하여 오게 되었다.”
사고(史庫)란 나라의 기록과 중요한 서적 문서를 보관하던 곳으로 서울 춘추관 , 충주, 전주 성주 4대 서고 이외에도 봉화의 태백산, 무주의 적상산, 강화의 마니산, 묘향산 사고(史庫)를 더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적기(事績記)가 우화정(羽化亭) 못미처에 있는 기념비 ‘조선왕조실록내장산이안사적기(朝鮮王朝實錄內藏山移安事績記)’에 자세히 적혀 있고, 370일 동안 내장산에 봉안된 그 역사적인 현장이 기름바위 지나서 금선폭포 가는 길 좌측에 있는 암굴 ‘용굴’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의 편수 간행작업을 직접하였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 즉위한 후 실록청을 개설하고 관계관을 배치하여 편찬하였으며 사초는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다. 적상산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을 분리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실록편찬시 이용되는 자료는정부 기관에서의 보고 문서 등을 정리해 둔 춘추관시정기, 전왕 재위시의 사관들이 작성해 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재, 일성록 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과 개인의 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들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그리고 기밀사무 등을 직필(直筆)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하여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가 없었으며,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까지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25대 군주의 실록이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기에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 세계에서도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록이다.
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은 빈약한 것이고, 남원조(南院朝)의 대남실록(大南實錄)은 548권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은 2,964권으로 된 대질이나 권수만 많을 뿐이지 기록내용은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6,400만 자인데 대해 황명실록은 총 1,600만자에 불과하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도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다.
셋째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나 천문현상과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요,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것이다.
넷째,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記述)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다섯째로,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를 가장 앞서 실용한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활자개량에 힘쓰고, 각종 도서를 간행해 온 전통이 있었다.
여섯째,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일이다.
선왕의 실록편찬사업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