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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곡고산 여수 앵무산 20161206 화

benel_jt 2016. 12. 6. 22:00

순천 곡고산 여수 앵무산

20161206 화 묏바람

 

산행코스 : 해창마을-저수지-용전삼거리-곡고산-앵무산재-앵무산-정자봉-봉두갈림길-농주마을(칠면초전망대)-용산전망대-생태공원-주차장

 

1040 등산로입구 도로 하차
1042 우석 김종익 묘소
1046 저수지 제방 앞 좌회전
1047 해창마을, 독립가옥 [곡고산정상 1.5, 앵무산정상 3.5]
1049 등산안내도, 해창용전 철탑
1051 신안주씨가족묘표석
1053 진주강씨가족묘
1056 해창과수단지 [하산길 0.6, 혜천약수 0.9]
1100 해창.용전사거리, 철탑 [천왕산 2.0, 앵무산 2.3, 용전마을 0.5, 해창마을 0.9]
1111 목재계단
1113 곡고산삼거리 [곡고산 0.1, 앵무산 1.5, 해창마을 1.7, 체육쉼터 0.7]
1121 곡고산정상 [앵무산정상 1.4, 해창마을 1.8]
1135 체육쉼터 [혜천약수터 0.6, 곡고봉 0.6, 서당골 1.6, 정상 0.8, 하사마을 2.5]
1148 암릉전망대
1153 앵무산정상 [곡고산(봉)정상 1.3, 사랑어린이학교(구농주학교)2.0, 큰골 1.3, 상두마을 1.9, 하사마을 1.7]
1205정자봉 [정상 .4, 평여마을 1.6, 하사마을 1.8]
1210 [봉두마을 0.5, 하사마을 1.7]
1215 중식
1232 용두재 [하사마을 1.0, 용주마을 1.2, 앵무산정상 1.2]
1251 숲속의궁전, 임도사거리 [용두재 1.2]
1254 도로, 앵무산등산로입구
1301 송무문(松鵡門)
1307 구동마을
1312 칠면초
1318 남도삼백리길 제1코스, 농주마을 앞 [용산전망대 0.5, 와온소공원 2.6, 용산입구 0.4, 노월마을 1.3]
1328 전망대입구(입장료안내판)
1351 쉼터
1355 용산전망대입구(13.km/왕복40분)
1408 갈대숲에 있는 안내판
순천에서 꼭 가야할 곳 6곳
-봉화산둘레길(미답)
-순천드라마촬영장(비례골길24,미답)
-순천만국가정원
-낙안읍성
-선암사
-송광사
1430 주차장

 

<10.28km/3:50>

 트랭글 GPX트랙 파일 첨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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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무문(松鵡門)..순천시 해룡면 농주리 송잠마을에 있는 제실인 듯...
소나무와 앵무새 무鵡... 특이하다.
교훈적인 이름보다 자연친화적인 이름..

 

농주마을 유래
농주마을 앞산을 용머리라 하고 파람바구는 여의주로 하며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희롱하였다 하여 '농주'라 하였다.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밑에는 거북 형상을 닮은 바위가 있는데 거북 등껍질을 닮아 '구등'이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이 안내판에서 좌로 1.5km 칠면초군락지, 우로 1.5km 용산 전망대
일행이 용산전망대를 선택한다.
칠면초군락지를 보고 와도 늦지 않을텐데....
난 칠면초군락지 방향으로 나머지는 용산전망대 방향으로 택했으나 조금 가다가 양편이 모두 모여졌다.

 

 

 

 

 

'순천판 최부자'로 불린 우석 김종익 선생

 

김종익(金鍾翊, 1886년 ~ 1937년)은 대한민국의 실업가로 호는 우석(友石)이다. 전라남도 순천 출신으로, 순천대학교와 우석대학교의 설립자이다.


일제강점기 교육인재 양성을 위해 5000억원을 내놓은 '참 스승'
순천시에 따르면 주인공은 월등면 대평리 출신 우석(友石) 김종익(1886~1937) 선생. 김 선생은 일제강점기 교육사업가이자 대지주로 지역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김 선생이 지역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이유는, 부친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갑부'였음에도 지역사회와 어려운 이웃에게 환원했다는 점이다.
서울(경성) 중동학교와 1931년 일본 명치(메이지대학)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우석 김종익 선생은 이재에 밝아 물려받은 재산을 미두거래(요즘 주식거래)에 투자해 큰 수익을 거뒀다.
1933년에는 조선제사(朝鮮製絲)를 인수해 자본금 100만원의 대기업으로 회생시키는 등 사업가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1937년 숨을 거둘 당시 유언을 남기고 천문학적인 액수인 전재산 175만원,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5000억원 정도에 달하는 금액을 지역사회을 위해 내놓고 임종했다.
우석 김종익선생이 이렇게 민족의식 계몽에 눈을 뜬 계기는 명치대 유학 시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인촌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김양수 등과 사귀면서 점차 애국청년으로 변해갔으며, 일제치하 조국의 미래는 교육과 식산(殖産)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불린 재산으로 우석대 전신인 서울혜화동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 고려대와 합병)'와 부속병원을 세웠고, 순천공립중(순천중)과 묵초육영회, 순천여학교(순천여중), 순천농업학교(현 순천대)에 토지를 기부하고 학교를 세운 보기드문 향토 육영사업가다.
1935년께는 소작농들이 흉년으로 생활이 어렵게 되자 몇년간 면민들의 호세를 대신 납부해주기도 했다. 그의 기부관은 이랬다.
"사람은 먹을 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여재는 사회공익 사업에 쓰는 것이 사회인으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우석 선생의 기부정신은 오늘 날 순천이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유지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는 점이 후세의 평가다.
순천고와 순천여고, 그리고 올 해로 개교 80주년을 맞은 국립순천대학교를 키운 공헌을 세워 지역민들은 우석 선생을 지금도 못잊고 있다.
김종익 선생은 특히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일군 부친(김학모)과는 달리 '정승같이 돈을 쓴'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육영사업가로 평가 받는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나 럭기금성(현 LG) 구인회 같은 경상도 부자들은 6.25 이후 부를 축적한 신흥갑부였지만,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는 일제 때도 '만석군'이 꽤 많았다.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하지만, 전 재산을 내놓는 '통큰' 부자는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석 김종익 선생은 오늘날 되돌아 볼 때 선각적 리더로 꼽힌다.
우석 선생은 사회복지 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적십자사와 나병협회 등에 거액을 희사했다. 우석 선생은 1937년 51세의 일기로 타계할 당시 유언장에 이렇게 남겼다고 전해진다.
△불우한 한국 학도들에게 학비를 대줄 것 △순천농업학교를 갑종(甲種)학교로 승격시킬 것 △순천 남녀고교를 설립해 줄 것 등이다.
이러한 우석 김종익 선생의 사회공헌 내막은 300년간 '부자의 품격'을 보여준 경주 최부자집(최준 선생)과 종종 겹쳐져 투영된다.
1947년 대부분의 재산을 '대구문리과대학(영남대 전신)'을 끝으로 부를 환원한 경주 최부잣집의 정신이 깃든 '육훈(六訓)'과 '육연(六然)'과 견주어 그 정신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순천의 후학들은 우석 김종익 선생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순천대와 순천고, 죽도봉에 동상과 기념비를 세워 그를 잊지 않고 있다.

 

 

 

곡고산 정상
정상에는 깃발이 하나 서 있다.
그리고 삼각점이 하나 있고 그 흔한 정상표석이나 표지목도 없다.

이 곳을 지나 앵무산 정상으로 가는 도중에 현지의 50대 등산인 한 명을 만나서 사천왜성의 위치를 물었더니 곡고산에서는 볼 수 있다고 하여 되돌아 가서 보려다가 지도를 통해서 볼 작정을 하고 포기했다.
팀의 진행 속도가 나보다 훨씬 빠르고 현재 내 위치가 가장 꼴지이기 때문에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 산이 '꼬끼오'하고 우는 닭의 모양에서 온 이름이라도 좋다고 치고, 곡식창고 즉 군량 창고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이순신과 권율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정유재란 때의 군량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면 왜성과 너무 가까운 곳에 식량을 둔다면 적을 이롭게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차라리 해창이 있으니 가까운 곳에 조세미의 수납을 위한 창고가 있었다고 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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