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지봉
덕유산 지봉
산행코스 : 신풍령-갈미봉-지봉-횡경재-송계탐방지원센터
산행시간 : 약5시간
덕유산 구천동의 슬픈 이야기 (첫번째)
1951년 7월 구천동..
경찰과 주민들은 빨치산의 총 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주력부대가 무풍면 철목리에서 벌한재로 넘어온다는 정보을 입수하고 벌한재로 매복을 나간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도착한 이현상부대가 공격을 가하여 대부분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해 9월 사방봉의 전투에서도 이현상부대에 패하고, 11월 안지들 전투에서도 패하여 고향을 지키겠다던 구천동 주민들이 거의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구천동에는 한 날 한 시에 수 십 가구에서 제사를 지내는 애석한 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또한 반동분자의 처자식이라며 현두식소위의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저지른 빨갱이들의 만행은 너무도 끔직하여 차마 여기 글로도 옮길 수가 없을 정도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덕유산 지봉의 슬픈 이야기(두번째)
2015년12월16일
산악회의 정기산행중 많은 눈으로 인해서 27명의 산악인들이 덕유산 지봉에서 조난을 당해 119구조대에 인도를 받고 하산중에 영하20도~30도의 강 추위에 19시간의 사투 끝에 견디지 못하고 1명의 회원이 끝내는 저체온증으로 인하여 세상을 달리한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졌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덕유산의 두 번째 슬픈이야기
지봉(못봉) 정상
송계사 갈림길인 횡경재를 지나 싸리덤재까지는 유순한 길이 이어지는데 싸리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래서 그런가, 재의 이름도 싸리덤재라고 한다. 이정목은 목을 길게 빼어 인사를 건네고 구천동 방향으로는 ‘등산로 아님’ 표지목이 세워져 오히려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좌측 사면의 처녀치마 군락지를 지나 고도250m 정도의 가파른 경사를 30여분 힘들게 치고 오르면 향적봉과 칠봉이 지척에 보이는 헬기장이 나오고 헬기장을 올라서면 아주 조망이 멋진 못봉(지봉)이다.
옛날에 이곳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못은 아마 헬기장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연못속으로 흰구름이 흘러가면 마치 연꽃처럼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여 못 池자를 써서
지봉이라고도 한다는데 정상석에는 『못봉』이라고 새겨져 있다.
손에 잡힐 듯 지척에 있는 칠봉과 운무에 싸인 향적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남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산군들의 조망이 너무나 좋다.
달빛이 아름답다는 월음재, 그곳에서 바라보는 북상면의 시골풍경도 정겹다.
여기서 대봉오름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키 작은 잡목이 많아 남쪽으로 드문드문 조망이
트이고 거창의 아름다운 산군들도 아른아른 눈 속에 잠긴다.
그들을 바라보며 40여분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이름에 딱 어울리는‘대봉’인데
조망이 그야말로 기가 막힌 곳이다.
삿갓봉까지 덕유의 주 능선이 선명하고 남덕유산과 서봉은 운무속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그 아래 월봉산으로 이어지는 칼바위와 금원산과 기백산라인이 참 좋다.
좌측으로는 가야할 갈미봉이 오똑하다. 갈미봉에서 대간은 좌측으로 틀어져 빼재로 향하게 되고 우측 호음산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은 금방이라도 달려오라는 듯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별 조망이 없는 갈미봉을 내려서면 대간은 뚝 떨어지는 급경사 비탈길로 변한다.
너무 급경사라 조심조심 내려선다. 20여분 내려섰을까 편안한 낙엽길이 이어진다.
이제부터는 오름길이 없겠다 싶었는데 또 봉우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끝까지 쉬운 곳이 없다더니 역시 대간 길이로구나.
어느 분이 마지막에 빼봉이라는 봉우리가 하나 더 있다던데 여긴가 보다.
빼재의 유래
‘빼재’는‘추풍령’을 본뜬‘신풍령’이라는 휴게소가 고개 아래쪽에 들어서면서‘신풍령’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지만「수령(秀嶺)」즉 뛰어난 고개라는 뜻의 고상한 이름을 붙여서 현재는「수령(秀嶺)」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휴게소는 폐업을 하여 을씨년스럽고 대중교통 한대 지나가지 않는 이 홀대받는 고개를 이름만 고상하게 짓는다고 뭐 달라질게 있을까마는 듣기는 약간 거시기 해도 ‘빼재’라는 이름이 정겹게 들린다.
옛날에 빼다귀 많던 곳이라 하니 그냥 빼재라고 부르고 싶다.
빼재(수령)에 세워져 있는 ‘백두대간 안내비’에는 빼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빼재’는 삼국시대부터 각 국의 접경 지역이었기에 전략적요충지로서 수많은 민관군이
이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고 임진왜란 시 이곳의 토착민들은 산짐승들을 잡아먹어가며 싸움에 임했다.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에 널리게 됐다고 해서 “빼재”라는 이름이라고 전해지며
뼈재가 경상도 방언으로 빼재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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