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역사 인물
정선 역사 인물
고려개국공신 전이갑
본관은 정선(旌善)이고 자는 자경(子經), 호는 도원(挑原)이다.
정선정씨의 중시조인 정선군(旌善君) 전휘선(全諱宣)의 7세손 전우상(全禹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관직에 올라 기랑(騎郞)을 지내던 중 왕건(王建)을 만나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신숭겸(申崇謙) 등과 함께 고려의 영토 개척에 큰 공을 세웠으며, 925년(태조 8) 태사(太師)에 추대되었다.
927년 견훤과 달성(達成) 팔공산에서 싸우던 중 태조(太祖)와 옷을 바꾸어 입고 왕(王)을 탈출 시킨 뒤 전사하였다.
열녀어머니 밑 효자 함재환
함재환은 정선군 임계면 골지리(骨只里)에서 함병태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1880년에 태어났다.
그는 늘 효심이 가득하고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하였다.
칼날같이 추운 엄동설한에도 따뜻한 솜바지, 저고리를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하였으나 부모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구해 드리기 위하여 골지리에서 강릉까지 150리 길을 걸어서 쌀과 생선을 구해 오기도 하였다 한다.
1930년 5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현재 임계면 골지리에는 함재환 어머니 강릉최씨 열녀비와 비각이 있다.
의병 김시백
의병 김시중(金時中) 장군의 동생으로 1886년 10월 27일 정선군 동면(현 고한읍) 고한리에서 출생.
1909년 6월 충주(忠州)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발각되어 피신하다가 달래강에서 적병 2명을 만나 살해하였다.
다시 영동(永同) 방면으로 이동한 후 영주(榮州) 시장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10년간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97년 국민포장)을 추서하였다.
향현 이규복
본관은 경주, 고려말 익제 이재현의 후손으로 1707(숙종 33)년 정선군 북평면 남평리에서 출생.
성품이 인자하면서도 강직하여 유년시절부터 성현의 학문을 배우고 익혀 성리학에 심취한 부분은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여러 선생들과 견줄만 하였다.
일생 동안 학문탐구와 성현을 숭배하고 후세교육에 전념한 유현이며 청빈 중에서도 청송의 고결을 고수한 도학자이고 도덕과 덕행이 높았으므로 명성이 멀리까지 전파되어 현재에도 과객이 이규복 선생의 행적을 탐문하는 자가 많다.
충의 이초
정선사람으로 고려말엽 공양왕 때 정5품의 무관직인 중랑장 벼슬로 이성계를 없애기 위해 모의를 하였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머물고 있던 순안군 방 동지 밀직사 趙반이 귀국하여 이초와 윤이가 난을 일으키기 위해 모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왕께 알려 그들을 잡아들이고 이 때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 등 수십명이 순군옥, 청주옥에 하옥되는 청주옥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이후 명나라 표수현(표수현-지금의 중국 강소성)으로 유배되었으나 스스로 자결하였으며 1932년 개성에 있는 두문동서원에 신주를 모셨다고 전한다.
항우장사 변이홍
안열(安烈)의 10대 후손으로 정선군 북평면 남평리에서 출생.
유년시절부터 담력이 크고 10여 명 정도의 장정도 당하지 못하는 기운이 장사였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다.
1592년(선조 25) 7월 임진란 당시 왜병 10여 명을 포박하여 남평리 갈분지(葛盆地) 산 밑에 있는 소(沼)에다 던져버려 몰살하게 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선릉참봉(宣陵參봉)을 제수하고 1605년에 의금부도사에 폐직된 후 1607년 79세로 세상을 떠나니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하였다.
충신 전민준
호는 백포(栢浦), 초휘는 세준(世俊)으로 강원도 정선읍 광하리에서 출생.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정선 향임 좌수로 있을 때 왜병이 백봉령을 넘어 정선 지방으로 침략하여 백성과 군수를 귤암리나팔동굴에 피신시키고 홀로 마을을 지키다 전사하였는데 왜병들이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그의 시신에 '조선충신(朝鮮忠臣)'이라고 쓰고 가 버렸다.
정선군에서는 공의 행적과 충절을 높이 추앙하여 무덤과 정려각을 광하리에 세우고 전민준의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의병장군 김시중
강원도 정선군 동면(현 고한읍) 고한리에서 출생.
수년간 한문 수학하여 일찌기 향교의 장의까지 지냈다.
1907년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에 가담하여 1909년 부하 약 50명을 인솔하고 지금의 사북읍 도사곡에서 일보병대와 치열한 교전중 적탄을 맞고 순직했다.
당시에는 가매장하였다가 후일 동생인 김시백이 부하와 같이 밤중에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내리 앞골 뒷산에 산소를 모셨다 하나 현재 그 묘소는 찾을 길이 없다.
1968년 3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으며 1986년 8월 15일 사북 도사곡 입구에 김시중 장군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계산 우정모
선생은 독립운동과 후세 교육에 노력했던 한학자(漢學者)로서 정선군 북평면 남평리에서 1874년 출생하여 일제하 36년간 이곳에 은거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배출하고 桂山문집 12권을 남겼다.
우국충정과 항일정신이 투철해 망국지민 불가정관(亡國之民 不可正冠)이라며 평양립(平凉笠)을 쓰고 두문불출한 체 후배양성에만 몰두하다 후손도 옶이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