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신마을의 유래와 항일투사 17인의총
의신마을의 유래와...
의신(義信)마을 유래
선인들의 말씀과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길지(吉地)로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는데, 지리산(智異山)에는 청학동(靑鶴洞)이 있다.
지리학자들의 기록이나 구전에 의하면 지리산 덕평봉(德平峰) 회포(回包) 40여리라고 하니 오늘날 대성리 전역이 청학동 범위에 위치한데, 그 중 우리 마을 의신은 가장 길지에 자리하고 있다.
제일 처음 입주한 분은 경주정씨(慶州鄭氏)인 복(復) 암장사 명일공(明日公)께서 우리 마을로 입주키 위해 부친인 일봉처사 윤만(允萬) 옹을 쌀자루 위에 모시고 벽소령을 넘을 때 도적의 무리들이 쌀자루를 강탈하려 함에 명일공께서 무서운 장력으로 도적들을 제압하고 쌀을 나누어 주며 순화하여 보낸, 지금까지도 수많으 상인들이 밤낮으로 다녀도 도적의 피해나 맹수들의 침해가 없어 제일 깨끗한 곳이라 하였다.
옛날 화개장(花開場)이 전국 5대 시장으로 명성이 나 있던 것은 섬진강 해로를 따라 수산물이 운송되어 화개장에 육로를 따라 모인 각종 상품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짐으로 삼남대로(三南大路)가 되어서 1945년까지도 많은 상인들이 화개장을 다녔다.
또한, 마을의 전통문화, 유적, 유물 등의 관광자원으로는 지시란역사관, 고로쇠 약수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아지트, 빨치산 루트, 서산대사가 득도한 원통암, 힐링코스인 4.3km의 서산대사길, 30만평ㅇ의 자연습지, 다양한 문화축제, 당산제, 의신사 부도, 의병묘 등이 있으며, 우리 마을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랑거리로서 풍부한 미네랄이 함유된 전국 최대의 고로쇠 수액 생산지와 자연산 버섯, 무농약 산골녹차, 야생 송이버섯, 산나물, 약초 등 각종 임산물과 마을을 둘러싼 아름다운 계곡(쿵쿵소, 용소, 배나무소, 어사바위의 천년송, 두꺼비바위, 선녀암 등)과 지리십경을 연계하는 관문 등 다양한 등산코스(연하천, 형제봉, 벽소령, 선비샘, 연신대, 세석 등)와 별자리 탐구 등이 있으며 천혜 자연화경의 보고인 저희마을에서는 자연과 삶을 함께하는 진정한 웰빙의 산 증인으로서 산촌 그린투어리즘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농,산촌 체험마을로서 2012년부터 100여세대의 주민들은 의신마을에서 지리산 반달가슴곰과 함께하는 의신 베어빌리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당산제의 유래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지내는 제사.
이것은 마을의 평안과 풍요 등을 기원하기 위해서 행해졌다.
산제(山祭), 동제(洞祭), 당산굿, 대동치성(大同致誠), 당제(堂祭)라고도 한다.
대개 음력 정월대보름과 정초에 지내나 10월 보름에 치르기도 한다.
제단 주변을 깨끗하게 한 뒤 부정을 막기 위해 황토를 펴고 금(禁)줄을 친다.
제주(祭主)는 마을의 연장자 가운데 건강한 사람이 맡으며, 1주일 전에 목욕재계한 후 육류를 먹지 않고, 상가(喪家), 산가(産家) 출입 등을 금하며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한다.
제물은 제주 집에서 제사 전날에 준비하고 비용은 제답(祭畓)의 수입 및 각 가정에서 추렴하여 마련한다.
제사는 보통 자정 이후에 시작하여 새벽에 끝낸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굿을 하고 제사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는다.
당산제는 제사와 굿의 이중성격을 갖고 있는 점이 특이하며 축제분위기로 부락민의 유대강화에 큰 역할을 한다.
솟대의 유래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
솟대는 마을공동체 신앙의 하나로 음력 정월대보름에 동제(洞祭)를 올릴 때 마을의 안녕과 수호, 풍농을 위하여 마을 입구에 세운다.
홀로 세워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장승, 선돌, 탑, 신목 등과 함께 세우기도 한다.
솟대 위의 새는 대개 오리라고 불리며 일부 지방에서는 까마귀, 기러기, 갈매기, 따오기, 까치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솟대신앙은 물을 상징하는 물새들을 장대 위에 세움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보장하는 마을신의 하나로 삼았다.
풍수지리설과 과거급제에 의한 입신양명의 풍조가 널리 퍼짐에 따라서 행주형(行舟形) 솟대에 돛대로서 세우는 짐대와 급제를 기원하는 화주대(華柱臺)로 분화,발전 되었다.
솟대의 기원은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분포는 만주, 몽골, 시베리아, 일본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이다.
이는 솟대가 북아시아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앙물임을 알려준다.
솟대는 형태를 기준으로 솟대, 짐대, 돛대, 설대, 새대, 장승대 등으로 구분되고,
기능을 중심으로 수살, 추악대, 진목, 소줏대, 표줏대, 효대 등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동제와 관련해서는 당산, 진또배기, 별신대, 성황대,
세워진 위치에 따라서는 거릿대, 갯대,
의인화를 기준으로 해서는 거릿대장군님, 대장군님, 당산할머니, 당산할아버지, 진또배기서낭님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모두 신간(信竿)으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지닌다.
마을 당산제와 솟대
의신마을에서는 마을 동네 뒷산에 200년 이상된 참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매년 해가 바뀌는 새벽(12시)이 되면 여기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제주는 1주일 전에 목욕재계한 후 육류를 먹지 않고 상가(喪家), 산가(産家) 출입 등을 금하며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집 입구는 황토를 펴고 대나무 가지를 걸쳐 궂은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10시 쯤 되면 목욕을 하고 몸을 단정히 한 다음 재물을 가지고 주산인 뒷산으로 가서 재를 지내는데 여기에서 주민들의 소원성취를 빌고 국태민안 등 모든 소망 사항 등을 소지 종이에 적어서불에 태워 올린다.
제의식이 끝나면 밥을 싸서 땅에 구멍을 파서 음식을 묻는다.
마을의 솟대는 마을의 지형지세 탓에 세워진 것이다.
마을은 지리산국립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다.
지리산의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흘러 내려 섬진강으로 흐르고 있다.
마을은 산줄기로 둘러싸인 마을터를 선학포란(仙鶴抱卵 : 학이 알을 품은 형상)형이라 한다.
또한 산줄기가 흘러내려 마을 앞에서 합수하는 모습이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 하여 행주형이라고 믿어왔다.
풍수지리설에 마을 모양이 배 터이다 보니 돛대에 해당하는 솟대를 지금은 옛지형이 변해 마을 입구로 옮겨 솟대를 세웠다.
또한 매년 정월 초하루 제를 올려 마을의 평안과 가정과 자손들의 번창을 기원드리며 특이한 것은 제를 올릴 때 객사밥(국가변란시/임란,활빈,한일합방,여수반란,6.25전란 등/항상 골이 깊은 이 마을에서 끝을 맺는다는 유래가 있음)을 같이 올리며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새해 세배를 올리며 남녀노소 즐거운 한마당 잔치를 치루면서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함.
우리 마을도 앞으로 산촌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사라져 가는 우리 마을의 전통과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면 대대로 이어질까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 있다.
항일투사 17인 의총..비의 뒷면에는 항일투사 30인 의총이라고 하고....
항일투사 30인 의총(義塚)
한일 강제병합이 있기 2년 전 1908년 2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 몸으로 저항하며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이한 항일 무명 영웅 30인아 아곳 지리산 화개면 의신(의신)마을 공동산에 잠들었다.
이곳에 묻힌 항일의병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다 1908년 1월말 의신마을에 도착했다.
의병들은 마을 서당에 본부를 두고 배명고지(지리산역사관 뒤 능선)에 초병(哨兵)을 세우고 벽소령 길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베 한 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토시와 길목(발등덮개)을 만들게 하고 음력설을 쇠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일(음력 설날) 아침 승려로 가장한 일본군이 절골(용화정사 터)에 있는 마을 주막으로 오는 것을 발견하고 발포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작전이었다.
일본군(변장대)은 마을에 침투하여 의병을 향해 기습공격을 하였다.
항일의병 80여명은 일본군에 맞서 이틀간 격렬히 저항했지만 일제의 막강한 화력 앞에 의병 50여명이 전사하고 생존자는 산청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 때 주민 일부도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후 의신마을 주민들은 항일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제 등, 진평전 및 계곡 산허리에 묻어주었으며 이곳 30명의 무명 항일영웅들의 묘는 그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봉분이 훼손됨에 안타까워 하동군민의 정성을 모아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고 삼가 항일의병비를 세운다.
2011년 8월 15일 (광복 66주년)
의신주민 일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