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 이덕형
한음이덕형선생묘 및 신도비[漢陰李德馨先生墓─神道碑]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木旺里)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덕형(李德馨)의 묘와 신도비.
경기 양평군 양서면. 경기기념물 제89호. 규모는 총높이 155㎝, 너비 60㎝, 두께 20㎝이다.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 경기기념물 제89호
지정일 : 1985년 09월 20일
시대 : 조선
소재지 :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82 지도
1985년 9월 20일 경기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광주이씨 좌의정공파 종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청계산(淸溪山) 서쪽 형제봉(兄弟峯) 줄기에 있다.
묘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 1기(基), 상석(床石)이 있으며 그 앞에 가로로 긴댓돌로 단을 쌓았다. 단 아래 좌우에는 동자석(童子石)이 있고 그 앞에 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이 좌우로 있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의 크기는 높이 155㎝, 너비 60㎝, 두께 20㎝이다.
신도비는 1653년(효종 4)에 세웠으며 묘역 아래 약 300m 지점에 있다.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 비좌(碑座)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올렸다. 크기는 높이 360㎝, 너비 110㎝, 두께 42㎝이고 근래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撰)하였으며, 정규상(鄭奎祥)이 전액(篆額)을 썼다. 신도비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이덕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영정각이 있다.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한음(漢陰)이며 어렸을 때 이항복과 막역한 사이로 많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60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으며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어 양근에서 병사하였다.
오성과 한음설화[鰲城―漢陰說話]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에 관한 설화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면서 장난이 심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다.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정(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이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 놓았던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⑥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참고문헌 :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이덕형 (1561년)
출생 : 1561년
사망 : 1613년 (53세)
조선 경기도 광주부 조안면(現 대한민국 남양주시 조안면)
직업 : 문신, 학자, 정치가, 시인
학력 : 1580년 문과 급제
이덕형(李德馨, 1561년 ~ 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정치인으로 동인(東人)과 남인(南人)의 일원이다. 같은 동인이었다가 북인이 된 이이첨은 그와 10촌 형제간이었다.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다. 절친한 친구 이항복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되었다. 한성부 출신이며 1613년 경기도 광주 사저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이덕형은 1561년 한성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전)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두뇌가 영특하여 소년 시절에 벌써 글 잘하고 얌전하기로 이름났고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받았다고 한다. [1] 14세 때에 영의정으로 있던 외숙부 유전의 집이 있는 경기도 포천의 외가로 가서 지냈는데, 당대의 글 잘하기로 이름 높던 양사언·양사준(楊士俊)·양사기(楊士奇) 형제들과 어울렸다.
청년기
어렸을 때부터 문학 실력이 뛰어났다. 이후 당시 명망있던 문신 겸 서예가, 학자인 이산해의 둘째 딸이자 이지함의 종손녀인 이씨와 결혼하였다. 뒤에 그는 가문을 따라 남인이 되었고, 장인 이산해와 처남 이경전(李慶全) 등은 북인이 되었지만 그가 이산해의 사위인 덕에 화를 모면했다. 실록에 의하면 그가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화패(禍敗)를 면할 수 있었다.[2]'고 한다. 이때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전해진다.
관료 생활 초반
1580년(선조 14년) 약관 20세 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전체 2위)로 급제하였다.[3] 이어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인 율곡 이이에게 발탁되어 홍문관정자(正字)가 되었다. 이때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하고 이덕형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고 한다. 과거 합격 동기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한 뒤 함께 옥당인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 뒤 이덕형은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修撰)과 교리(校理),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0년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1년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조선시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제학이 되었다. 겐소, 다이라 등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출처 필요].
1591년 8월 그의 처남 이경전이 사가독서에 선발되지 않았으므로 장인 이산해가 크게 노하였는데, 이때 장인 이산해의 부탁을 받고 다시 아뢰게 하여 이경전이 마침내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4]
임진왜란 전후
1592년(선조 25년) 사헌부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을 때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으로 있던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과 화의 교섭을 했으나 실패, 결렬되었다.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중 1593년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을 수행하였고,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특히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울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4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의 아내 한산 이씨는 왜군에 포로로 사로잡혔고, 왜군에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하였다.
전란 종결 이후
1599년(선조 32년) 윤 4월 9일 중국 명나라의 장수 유제독(劉提督) 휘하의 항왜가 독약을 잘 만들자, 이덕형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도감의 초료를 내서 항왜 사야여문(使也汝文) 등에게 주어 항왜를 꾀어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항왜가 황해도 평산군에 이르러 달아나자 제독이 크게 노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끝까지 추적하여 잡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선전관 이괄을 보내 계략으로 잡아 참수하게 하고 그 머리를 보내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투항한 항왜를 죽였다는 이유로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켰으나 겨우 무마되었다. 1599년 겸문학(兼文學), 그해 12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으며, 1600년 1월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곧 도원수를 겸하였으며,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 1601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4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종결 후의 군대 정비 및 민심 수습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 중의 공신을 책봉할때 호성공신, 선무공신에 모두 추천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1608년 6월 진주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1609년 10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명나라에서 임해군의 존재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유로 들어 광해군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그는 스스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되돌아왔다. 1611년 8월 좌의정, 1612년 11월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 정권과의 갈등과 은퇴
1613년 6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렸으며, 병을 얻어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 그의 일족인 이이첨이 대북의 영수였으나 그는 인목대비의 폐모와 영창대군의 사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병을 이유로 의정부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모든 관직이 삭탈되었다. 1613년 10월 사저가 있던 당시의 경기도 광주부(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인조 즉위 후 복권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현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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