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광양 선소터와 어영담 추모비

benel_jt 2016. 6. 14. 22:57

광양 선소터


광양 선소(船所)에 대한 기록은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1594년 1월에 기록한 壬辰將草(임진장초)에 있다.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다섯 고을 즉 순천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에서 만들고 있는 전선을 1593년 12월 12일 직접 검사하였고, 1594년 1월 17일 그 중의 일부를 이끌고 한산도로 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소터는 배를 만들던 곳이란 의미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광양현감 어영담 추모비
어영담은 1532년 경상도 함안 출신이며 영호남의 수군으로 오래 재임하여 남해안 물길과 지형을 꿰뚫었고 생각이 남달리 뛰어나 해전의 방략에 능통했다.
1591년 3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할 무렵 광양 현감이 되어 임진년 전후의 사나운 인심을 안정시키고 섬진강과 성을 지키는 군사행정도 빈틈없이 펼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해역으로 진출할 때 수로 향도를 자청했고, 선소의 광양 함대를 이끌고 나가 이순신의 중부장으로서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해전의 연전연승에 큰 공을 세웠다.
어영담이 웅천해전에 출전했을 때 광양현을 순찰한 독문어사가 창고에 쌓아둔 양곡을 문제삼아 1593년 11월 현감에서 파직하자 고을 사람들이 구명에 나섰고 이순신도 옹호하여 조방장 임명을 요청했다.
1594년 3월 삼도수군 주사(舟師) 조방장 어영담은 제2차 당하포 해전을 지휘했고 진중에 크게 번진 전염병으로 4월 9일 운명했다.
이순신은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애통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魚助防將棄世 痛嘆何言)하며 한탄했다.
어영담과 광양수군은 해양 전술과 지형지물에 밝고 전투력이 막강하여 접전할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돌진하여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어영담의 살신성인과 함께한 광양인들은 육상 의병 활동에도 목숨을 바치며 충정을 빛냈다.
이에 우리 고장과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빌며 추모의 정을 새기나니, 숭고한 선조들의 얼과 빛나는 고을의 전통이 늘 살아 있으리라!
2015년 3월
광양선소 임진왜란 호국선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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