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 진악산 산행 20150207토
충남 금산 진악산 산행
20150207토
07:30 덕천동에서 출발(조금 지나서 도착했던 것 같다)
어지간히도 벼르던 산이었는데 다른 분들은 대부분이 다녀온 산인지 44인승에 24명이 탑승했으니 겨우 반을 넘겨 가게 되었다.
10:40분 정도 지나서 금산시 남이면 경계의 수리넘어재 휴게소에 도착했다.
수리넘어재는 올레네비나 네이버지도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사장의 버스 네비에는 나타났다. 혹시 다른 곳인가 싶어 확인했는데 금산이 맞게 나왔다.
나는 폰에서 주소를 입력해서 길을 확인했는데...
하산지점은 대소형 보석사 무료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 부근에 의병승장비가 있고, 의병전승비가 있는 것으로 네이버지도에 나타나 있어 둘 다 찾아볼까 하고 위치를 미리 확인해 두었다.
그런데 하산하면서 일주문 옆의 의병승장비는 있었지만 석동2리마을회관 옆의 의병전승비는 보이지 않았다.
옆의 금산간디학교에 들어가서 한 분에게 물었지만 8년 동안 여기 살았는데 보고 들은 바가 없다고 하기에 네이버지도의 오류인가 하고 포기했다.
겨울의 다른 날에 비해 비교적 포근하여 복장도 좀 가볍고, 아이젠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정상 부근으로 가니 빙판길에 경사가 있어 아이젠을 착용했다. 관음굴에 갈 때는 특히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오르면서부터 서쪽으로 약간 멀리 보이는 산이 대둔산인 것 같다고 하는데 다른 산이름을 대며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남의 산지식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마음을 더욱 굳어지게 하는 대목이다.
폰으로 열어서 지도를 정치하고 보아도 알 수 있으니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데 쉽게 답을 구하려다 오히려 어슬픈 정보를 가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믿을만한 이들이 제법 있으니 크게 도움되는 건 다행이다.
시야가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대둔산은 선명하게 보이고, 그 좌측으로 완주 천등산이 외따로 덩그라니 솟았다.
기답지로 선야봉(네이버지도에는 선야산)을 확인하고, 반대편으로 서대산,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영동 천태산,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나즈막한 자지산, 부엉산, 우측으로 갈기산, 월영봉의 방향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도구통바위에서 하산하는 방향인 보석사로 내려가는 길에는 여름이면 숲이 제법 우거질 것 같다. 계곡의 수량도 괜찮을 것 같다.
하산길에 영천암과 보석사를 살짝 둘러보았다. 보석사에는 10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가 40m 높이라 전신을 촬영하려면 보석사의 대웅전 옆에까지 올라가야 제대로 사진에 담을 수 있다.
보석사의 대웅전에 상량문을 게시판에 게시해 두었다.
특이한 기록이다. 한자로만 표기되어 있다.
의병승장비는 비각에 갇혀 있다. 옆에 안내판이 있다.
하산 시간에 여유를 두었기에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하산 후에 금산 인삼시장을 돌아보고 왔다.
인삼이 열을 낸다고 하여 우리집에서는 금기식품인데...
10:43 수리넘어재 도착
10:48 산행 시작
11:00 고개위 능선
12:04 관음굴
12:19 진악산 정상
13:00 물굴봉
13:14 도구통바위
13:49 영천암
14:04 보석사은행나무
14:09 대웅전
14:14 의병승장비
14:19 석동2리경로당
14:25 주차장
총거리/소요시간 : 7.1km/3:40
관음봉
관음봉은 우측 비지개날로 남산과 제천대가 있고 가운데로 조종산이 자리하며 좌측으로 수리미재로 금산을 두르고 있어 진악산 주봉(732.3m)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시대 강처사가 이 봉우리 아래에 있는 관음굴에서 기도를 하여 인삼의 씨앗을 얻었다고 하여 관음봉이라 한다.
진악산을 대표하는 봉우리로 생명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수리뫼 또는 관앙불봉이라고도 한다.
진악산에서 보이는 금산군의 산들
대둔산(878) :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인대산(666) : 금산군 진산명 삼가리
오대산(569) : 금산군 추부면 묵산리
금성산(438) : 금산군 금성면 마수리
만인산(537) : 금산군 추부면 마진리
서대산(904) :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천태산(714) : 금산군 제원면 신안리
월영산(529) :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물굴봉
진악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735.7m)로 그 아래에 바위굴이 있는데 너댓걸음 들어가면 물소리가 요란하여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진악산 물굴봉이 머리이고 금성산과 서대산이 몸통이며 영동 양산이 용의 꼬리에 해당되어 용이 사는 굴이라 용굴이라고도 하며 날이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집어 넣으면 영험이 있다고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이정표의 개삼터....
개삼터[ 開蔘-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 있는 관광지로 인삼재배가 처음 시작됐던 곳이라 한다.
인삼의 고장 금산군에서 최초로 인삼을 심기 시작한 곳이라 하여 개삼터(開蔘止)라고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1,500여 년 전, 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인삼씨를 뿌리면서 인삼 재배가 시작되었다 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강처사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진악산 아래에 살았는데 어느날 어머니가 병들어 자리에 눕자 온갖 약을 구해 병구완을 하였으나 병은 날로 악화되었다. 그는 금산의 명산 진악산에서 가장 높은 관앙불봉(觀仰佛峰) 동쪽 10여m에 있는 관음굴에서 모친의 쾌유를 빌며 백일기도를 올렸다.
하루는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관앙불봉 바위벽에 가면 붉은 열매 세 개가 달린 풀이 있다. 그 뿌리를 달여 어머니에게 드리면 병이 곧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산신령이 알려준 곳에 가 그 풀의 뿌리를 캐 어머니께 달여 드리자 정말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고 한다. 강처사는 신비한 풀의 씨앗을 받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개안마을의 밭에 뿌렸는데, 그것이 바로 인삼이라는 것이다.
금산군은 이 전설에 따라 1981년 ‘개삼터’라는 표석을 세우고, 1983년 ‘개삼각’이라는 건물을 지었으며 개삼각 옆에 ‘강처사의 집’을 지었다. 1991년 4월 금산군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개삼각은 진악산 산신령을 모시는 목조건물로,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이다. 내부에 산신령이 강처사에게 인삼을 전해주는 그림이 걸려 있고, 바깥의 넓은 잔디밭에는 인삼관련 조형물을 배치하였다.
금산군은 1981년부터 해마다 9월에 금산인삼축제를 열고 있는데, 개삼각에서의 인삼제전을 시작으로 축제의 막이 오른다. 인삼제전은 인삼을 이 고장에 재배토록 해준 산신령에게 예를 올리고 인삼농사가 풍성하게 되기를 기원하는 제사인데 예로부터 인삼경작인들이 인삼포를 완성하고 인삼의 새싹이 오를 때 행하던 삼장제를 재현한 것이다.
도구통바위
모양이 도구통처럼 생긴 바위로 물굴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바람맥이 날망에 있다.
풍수적으로 노적봉이 노적가리이고 금산읍이 확이며 도구통바위가 절구이고 방아고개가 방아다리 향국이라 하여 금산이 부족함이 없이 풍요롭게 산다고 한다.
또한 선사시대 소도의 솟대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날망 : [명사] [방언] ‘마루1(1. 등성이를 이루는 지붕이나 산 따위의 꼭대기)’의 방언(충북).
<언덕위>를 뜻하는 충청도 사투리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
지정별 : 천연기념물 제365호
위치 :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09
보석사 입구에 있으며 높이 40m, 흉고둘레 10.4m로 나무의 나이는 10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나무가 오래되어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뻗었고, 다시 그 곳에서 가지가 자라 오르고 있으며, 뿌리가 100여 평에 걸쳐 땅속에 퍼져 있다.
장엄하고 위압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으며, 중심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어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며 이 은행나무는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소리내어 울음으로써 재난에 대비하도록 알려주는 마을의 수호신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매년 음력 2월 15일(경칩)에 보석사 신도들이 은행나무 앞에서 대신제를 지낸다.
보석사(寶石寺)
지정별 : 전통사찰 제5호
위치 :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11번지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진악산 남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보석사는 대한불교조계쫑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현제의 도량은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한 때는 이 곳에 강원(講院)이 있어서 많은 학승이 배출도었으며 31본산 중 하나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한 사찰이었다.
도구스님이 창건 당시 절 앞산의 금당에서 채굴된 금으로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하여 절 이름을 보석사라 하였다.
현재 보석사에는 1990년 천연기념물 제 365호로 지정된 은행나무와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 문화재자료 제29호인 의선각을 비롯하여 등운선원, 기허당, 산신각, 범종루, 일주문, 요사채, 주지실 등이 있다.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지정별 : 문화재자료 제23호
위치 :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82
의병승장(義兵僧將)으로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中峰 趙憲)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騎虛堂 靈圭大師)의 순절사적비(殉節史跡碑)로서 1840년(헌종6년)에 보석사 입구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이는 우의정 조인영(趙寅永)이며, 금산군수 조취영(趙冣永)이 글씨를 썼고, 비는 비각 안에 있다.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승장(義兵僧將)'이 새겨져 있으나 자획(字劃)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왼쪽 면에는 창건화주(창建化主) 낙봉대인(樂峯大仁) 등 건립 당시의 관계인물의 이름을, 오른쪽 면에는 앞면의 '의병승장'을 창녕위 김병주(창녕위 김병주)가 썼음을 기록하였다.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하여 땅에 묻혔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래 글은 사진을 보고 옮겨썼지만 글자를 정확히 읽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줄거리를 파악하는데는 별 지장이 없을 듯하여 게시함을 참고 바랍니다.
영규대사의선각비(靈圭大師義禪閣碑)
영규의 성은 밀양박씨요 호는 기허당(騎虛堂)이었다.
그는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불문에서 깊은 학문을 쌓았고 공주 청련암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대사는 평소에 뛰어난 힘이 있었으며 지팡이로 무술을 연마하기를 좋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대사는 통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사흘 동안 통곡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관가에 들어가서 의병장으로 나서기를 자청하였더니 공주목사 허?은 그의 장한 의기에 감복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대사는 곧 승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다른 방어장들과 함께 청주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웠다.
관군은 모두 패하여 달아나고 대사가 거느린 의병만이 적과 맞서 싸우는데 마침 의병장 조헌이 의병을 거느리고 달려오니 마침내 청주 서문에서 적군은 ?? 달아나게 되었다.
이 때 조헌이 금산에서 들어온 적군을 진격하려 하므로 대사는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대사는 조공이 혼자서 죽게할 수는 없다 하고 그대로 함께 따라 나섰다.
금산읍에서 10리쯤 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비가 쏟아져서 우리 군대는 미처 진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대사는 전쟁이란 준비 태세가 갖추어진 뒤에라야 후환이 없는 것이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먼저 대세를 정돈한 뒤에 싸우자고 하였으나 조공은 적의 병력은 우리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소. 나는 다만 군대들에게 충의의 정신을 고무하여 의기로 적의 기세를 꺾으려는 거 뿐이오 라고 하며 싸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에 적군이 습격해 왔는데 아군은 병력이 약할 뿐더러 후속부대가 이르지 않아 조공이 전사하고 전군이 모두 죽었다.
어떤 사람이 적군이 이렇게 몰려드는데 왜 빨리 이 곳을 떠나지 않느냐 하였으나 도리어 대사는 그를 꾸짖으며 이제는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느냐 고 하며 더욱 힘을 내어 싸우다가 또한 장엄하게 순절했다.
이 때는 선조 25년(1592) 8월 18일이었다.
정부에서는 대사가 나랏일에 목숨을 바쳤으므로 불교의식에 의한 화장법을 쓰지 않고 유교의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루었는데 지금 공주군 개류산에 대사의 무덤이 있다고 전한다.
금산에 조용사(?)가 있어 조공의 신위를 모시고 대사도 함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200여년 뒤 금상(??)원년에 불교신도 대인(大仁)이 군의 남쪽 진악산 서쪽 기슭에 따로 사당을 짓고 대사의 초상화를 모시고 명칭을 의선각(의선각)이라 하고 대사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 사우를 주곤한 이는 금산군수 조취영이요, 건물을 세운 이는 충청도 관찰사 충주목사 조헌영이다.
원비 헌흥6년(1840) 우의정 조인영 지음 이 비를 세우는 데에 재정을 담당한 이는 낙봉대인, 춘담대인이요, 도감은 춘차재첩, 벽담괘일, 정능, 두신이요, 새긴 사람은 유필주, 최광로, 유대주다.
1980년 9월
문화재위원 임창순, ?? 장암, 이곤순 씀
의선각 옆의 이 비석들은 그 흔한 무슨 불망비들이다. 관료가 떠날 때 관행적으로 세워주던 불망비가 아닐까...진실로 민의를 알아서 백성을 위하는 사람들을 기리는 빗돌들이기를 바라면서...
혹시나 의병전승비가 이리로 옮겨졌나 싶어 챙겨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