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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망우당공원, 영남제일관, 고모령전설의 형,제봉, 모봉, 연호산, 고모역 20211123 화

benel_jt 2021. 11. 23. 20:20

대구 망우당공원 영남제일관 고모령전설의 형,제봉, 모봉, 연호산, 고모역 20211123 화 솔로(K)

 

코스 : 동대구역-조양회관/광복-망우당공원/홍의장군곽재우장군동상 등-베트남참전기념비-영남제일관-고모령노래비-제봉-형봉-두사충묘소-모명제-명정각-모봉-고모역-경산역

 

교통편 : ~0825 동대구역-동대구역~조양회관(156번버스), 고모역-대공원역 택시, 대공원정류소~경산역(399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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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제일관, 금호강 방향을 바라보며..

1980년 이건한 것으로 처음의 문보다 규모가 크게 만들어졌다.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망우당공원 종합안내도

 

임란의병관/문이 열리지 않아...

 

임란호국영남충의단 전시관

 

임란호국영남충의단

망우당기념관

홍의장군곽재우 동상

 

동구 6.25, 베트남(월남)전 참전 기념비

달성하씨 유적비

유적비 뒤로 흐르는 금호강

대구부수성비

 

 

영영수축비

 

제1코스 : 형제봉길/영남제일관에서 모명재까지의 길이다.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자전거경기장

형제봉으로 건너가는 육교 위에서 내려다 본 경부선 철도 

이같은 이정표가 가는 길 내내 세워져 있다.

 

모명재길 종합안내도

 

육교 건너 도로를 지나 들머리에 형제봉 안내도.

안내도 옆의 에어건

철망에서 벗어나 좌로 올라간다.

 

여기는 형제봉의 이야기를 오누이의 경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누이의 힘겨루기 이야기는 우리 나라 곳곳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예산의 봉수산에 있는 임존성의 이야기에도 오누이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이사야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내려온 위쪽이 두한필 묘, 모명재 입구 쪽에 있는 명정각의 효자비가 주인공이다.

 

몇 개의 이정표가 두사충 묘를 안내하고 있다. 두한필의 묘에서 약 100m 정도 될까.

모명선생 두공의 묘(두사충의 묘)

 

두사충의 묘

명정각의 비, 명정각의 주인공인 두한필 묘소는 모명재 뒤에 있다.

 

두사충[杜師忠]
조선 중기에 귀화한 무장.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장차 명나라가 망할 것을 알아차리고 조선에 귀화했다.
출생-사망 : ? ~ ?
본관 : 두릉
호 : 연재
본관 두릉(杜陵). 호 연재(蓮齊). 명나라 기주자사(冀州刺史) 교림(喬林)의 아들. 본국에서 상서(尙書) 벼슬을 지내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으로서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 및 그 사위 진인(陳隣)과 함께 왜병을 격퇴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장차 명나라가 망할 것을 알아차리고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大邱)에 정착해 영주하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그의 본향(本鄕)인 두릉을 본관으로 하여 대(代)를 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사충 [杜師忠]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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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李時發-杜師忠-交分]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설화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시대 : 조선/조선 후기
출처 : 디지털진천문화대전-「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에서 이시발과 두사충 사이의 시은과 보은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은 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의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해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1569~1626]의 시은담(施恩談)이자, 이에 보답하고자 천혜의 명당을 이시발에게 알려주는 두사충의 보은담(報恩談)이다.

채록/수집상황 : 2004년 진천상산고적회에서 간행한 『진천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그의 사위 진린(陳隣) 및 명풍수 두사충을 위시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辰]의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이여송이 진천 인근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두사충에게 “어느 곳에 진을 구축하면 승리할 수 있겠는가?” 하며 자문을 구했다. 두사충은 산세 및 지세를 염두하고 조심스럽게 한 곳을 주둔지로 정해 왜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여송은 패전의 책임을 두사충에게 물어 그를 이내 처형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곳에 은거하고 있던 경주이씨 11세손 벽오 이시발이 자청하여, “전세의 결과는 두사충과 관련이 없습니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고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오랜 전투에 지친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문제되었을 따름이니, 청컨대 두사충을 사면해 주옵소서.” 하며 수차례에 걸쳐 이여송을 설득했다. 결국 이시발의 진정을 이여송이 참작하여 두사충은 사면될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이 날로 두터워졌다. 또한 두사충은 이시발의 은혜를 항상 마음속에 두고 매양 갚을 도리를 숙고하였다.

어느 날, 두사충이 산세를 살펴보다 천혜의 명당을 발견하고 이 자리를 이시발에게 일러주었다. 바로 오늘날 와우형(臥牛形)의 지전(芝田)마을 뒷산이다. 아직도 이 자리 아래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건너편에는 양지 바른 들이 펼쳐져 있다. 그 후에 이를 ‘볕이 좋은 들’ 즉 양촌(陽村)으로 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의 주요 모티프는 '처형 위기에서 구출해 준 이시발의 시은', '명당을 알려준 두사충의 보은’ 등이다. 이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명당으로 갚아주고, 둘의 교분이 날로 깊어졌다는 우애담이다. 또한 두사충이 이시발에게 알려준 명당자리는 지금의 지전마을 뒷산으로 '양촌'이라고 불린다는 지명유래담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진천의 구비문학』(진천상산고적회, 2004)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네이버 지식백과] 「이시발과 두사충의 교분」 [李時發-杜師忠-交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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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杜師忠]
생몰연대 : 미상

시인 두보의 21대손[1]으로 섬서성 두릉(杜陵)[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시 옌타구雁塔區 취장신구曲江新區]에서 기주 자사(冀州刺史)를 지낸 두교림(杜喬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가 진린에게 시집갔기에 진린의 처남이 된다. 이순신과 매우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두사충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시를 써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去同甘苦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
東來共死生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城南他夜月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아래
今日一盃情 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명군에서는 지형을 살펴 진을 칠 곳을 정하는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로 일했다고 하며, 이순신이 죽은 뒤에 묘자리를 처음 봐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는 그가 명군의 횡포에 시달리는 조선의 서민들을 위해 자신이 찾은 명당들의 위치를 적은 예언서인 <두사충비결>(杜師忠祕訣)이란 것도 있다. 물론 실제로 그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 두 아들을 데리고 조선에 왔다. 아내가 조선에 가는 것을 싫어해서 아내는 고향에 남겨 두었는데, 두사충이 조선에 남게 되면서 그대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진린에게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 곳에 남겠다."고 한 다음 압록강까지 배웅을 하고 조선에 돌아와 그대로 귀화하여 정착했다.[3]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정착했으며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였는데, 이것은 현재 대구 남구 대명동과 도시철도 대명역의 유래가 되었다. 경주시에도 대명동이 있는데, 이 역시 왜란 때 명나라에서 귀화한 시문용이 살았던 곳이다. 두사충은 사후 현재 수성구 만촌2동에 있는 옛 남부정류장 부근에 묻혔으며 지금도 무덤이 남아 있다. 생전에 늘 단을 쌓고 매월 초하루마다 고국의 천자에게 배례를 올렸다고 하며, 지금도 무덤 앞에는 명나라를 기린다는 뜻에서 모명재(慕明齋)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현재 두사충의 자손은 100여 가구에 달한다고 하며 모명재 앞에는 이순신의 7대손 삼남 수군통제사 이인수가 두사충의 묘비문을 다시 베껴다가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타국에 정착해서도 자기 나라 천자를 기리는 사당까지 지을 정도면 고국을 많이 사랑했던 듯한 사람인데, 본격적으로 망국되지도 않은 시점에 귀화를 택한 이유는 아리송하다. 어쩌면 만력제 시대에 명나라에 망조가 드는 걸 보고 나라가 오래 못 갈 것을 예상했던 것일지도.

[1] 더 윗대로 올라가면 한의 어사대부 두연년과 진의 장군 두예가 있다.
[2] 현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시 옌타구(雁塔區) 취장신구(曲江新區).
[3] 그리고 몇십 년 뒤에 진린의 손자 진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로 있던 중 아버지가 애산에서 청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나라까지 망하자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며 조선으로 귀화했다.

 

 

 

모봉으로 가는 길의 철망 밖에 있는 돌비에 法자가 뚜렷하다.

 

모봉 정상(150m), 헬기장

동대사방향에서 오는 길이 정식으로 개설된 코스이다.

모명재에서 가까운 길을 택하다 보니 길이 없는 곳을 오른 셈이다.

 

 

 

 

어부바 쉼터

연호산 정상(130m)

전우쉼터

왼쪽은 사유지라고...철망 옆을 지난다.

오늘 계속 철조망을 통과했다.

군부대, 구치소, 사유지...

 

폐역시 고모역, 지금은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열지 않는 고모역과 철로의 연결 문

고모령둘레길은 영남제일관에서 출발하여 고산서당까지

모명재길 종합안내도에서 

내가 걸은 길은 황색 화살표로 나타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