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남산(108m), 고성왜성, 고성읍성 20210518 화 <솔로>
고성의 지리적 조건이 남쪽 고성만, 북동쪽 당항만, 동쪽 당동만에 연접, 옛날부터 해상교통이 편리했던 곳
고성지방 성곽(城郭)은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17개의 성곽(城郭)이 조사되고 있다. (왜성 1 미포함)
읍성(邑城) 1, 산성(山城) 16, 왜성(倭城)1, 모두 18개의 성(城)이 남아 있다.
가야시대 (또는 삼국시대)의 성곽(城郭)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은 4개,
거류산성(巨流山城) 시굴 조사한 결과 가야시대의 성곽이 아니고 신라말(新羅末)또는 고려초(高麗初)의 성곽.
소가야(小伽耶)시대의 성곽 : 만림산(萬臨山 또는 萬年山)토성, 남산토성(南山土城)정도.
고성읍성(邑城)이 축조되었던 이곳은 소가야국(小伽耶國)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고성읍의 중심지로 전설에 의하면 소가야국의 왕궁터가 이 성내에 위치하였다고 전하며 소가야(小伽耶)의 성터(城址)가 존재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아직도 밝혀진 바는 없다.
고성읍성(固城邑城) : 세종30년(1448년)에 축조(築造)
<고성신문2008.5 참고>
<경남 고성군의 성곽>
고성읍성 : 고성군 고성읍 성내동/소가야(추정)..고성왜성
장치리성지 : 고성군 삼산면 장치리 산167/선조
대독리성 : 고성군 고성읍 대독리/선조1592
사곡리성지 : 고성군 하이면 사곡리 산41
성전리성지 : 고성군 마암면 성전리 산33
철마산성 :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소가야
양촌리성지 :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176
거류산성 : 고성군 거류면 가려리 산80/소가야
<경남 고성군의 봉수>
우산리봉수 : 고성읍 우산리 산219, →남/미륵산, →북/천왕점
천왕점봉수 : 삼산면 두포리 산99,해발254m봉화산→동/곡산, 남/우산
가을포봉수 : 하일면 송천리→서/곡산, →북/함안군 파산
봉화산봉수 : 대하면 엄전리→우산리봉수로 전함
곡산봉수 : 동해면 내곡리/내곡리성지라는 소형 토축성 흔적이 있다.
→ 동/진해현 가을포
→ 서/천왕점
<위 자료는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이 1991년(초판 1989)에 펴낸 한국의 성곽과 봉수 상중하의 하권에서 참고>


GPX트랙 파일 첨부 :





남산공원 입구의 비석군들





호국참전유공자비

국군장교 형과 인민군 동생이 전투에서 상봉하는 장면...이게 6.25 한국전쟁 실화






탑보다 이들 한 분 한 분의 이름이 더 소중하다.

남산의 정상, 남산정, 해발 109m에 위치







고성 회화나무 이야기



도로옆 사설주차장의 안쪽 벽이 성터였음을 알 수 있다.

수남리 62-3번지에서 촬영
동문(東門)이 있었던 읍사무소의 동쪽 담벽과 서외리 옥골 주변의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새 도로가 개설된 근방과 수남리 왜성과 연결되는 지점 등에 성벽이 남아있다.<고성신문>

위에 덧댄 돌담의 아래 부분은 원래의 성곽이었을 듯 하다.


마을의 집 담장 돌들도 예사롭게 볼 수 없다.





군청사

고성읍성지
고성군 고성읍 49
고성읍 서외리에 동서방향으로 길게 벋은 구릉의 북쪽 사면부에 조성된 토성이다.
축도시기는 9세기 전반이며 세종30년(1448) 고성읍성이 축조되기 쩐까지 고성의 중심성곽으로 사용되었다.
토성은 축고된 이후 고려시대에 최소 3차례의 수축이 이루어진 것이 확인된다.
토성 내외부에서 '一品', '二品', '三品□大□', '保勝', '養戶上□' 등의 명문기와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러한 명문기와는 고려시대의 군사제도 및 수취체계와 관련된 것으로 당시 사회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토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9세기 전반 고성군 태수로 부임한 태종무열왕의 9세손 김양(金陽)과의 관계가 주목된다.

고성읍성의 흔적으로 내가 본 것은 이것 뿐...
도로명 주소에 성내리## 등은 많이 보인다.
고성읍성의 남벽이 고성왜성의 북쪽으로 활용되었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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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읍성(固城邑城)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성내리, 서외리, 수남리 일대에 있는 읍성이다.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89호 고성성지(固城城址)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가야 말로왕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는 고성성지는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고, 고성읍성과 고성왜성의 일부가 남아있다.
고성읍성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둘레 3,524척, 높이 15척이며, 우물이 14개 연못이 1곳 있다고 전하나,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었다.
고성왜성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남해안에 주둔하기 위해, 남해안 일대 요충지에 쌓은 성의 하나로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전체적인 구조나 규모를 알기 어렵지만, 주변에 있는 송학동고분군(사적 제119호)이나 고성 동외리 조개더미, 만년사 토성과 관련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곳에 가야 때부터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명칭 변경 사유
고성군 관내에는 읍성(邑城)을 비롯하여 왜성(倭城), 남산성지 등 곳곳에 시기와 성격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성곽이 남아있으며 현재의 고성성지라는 명칭은 특정 성곽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 그 대상이 모호하게 여겨질 우려가 있다.[1]
따라서, 명칭의 혼동을 방지하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읍성이 조선시대 현(縣) 또는 읍(邑)의 지명에 읍성을 붙여 부르는 일반적인 사례에 따라「고성성지」를 「고성읍성」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1]
명칭 논란
그중 하나는 고성읍성(固城邑城)이고 다른 하나는 정유재란 당시 일본인들이 축조한 성으로 고성왜성(固城倭城)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현재 두성을 합쳐 고성성지(固城城址)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이 성지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장기 주둔을 목적으로 남해안에 쌓은 30개의 성 가운데 하나인 고성왜성을 지칭하고 있다. 지난 1597년부터 1598년 사이에 일본의 부장 깃카와 히로이에 등에 의해서 축조 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바로잡아야하는 이유는 고성읍성은 세종 24년 ~ 30년 사이에 왜구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성이고, 고성성(固城城)은 일본이 왜성(倭城)을 축조해 놓고 그 이름을 고성성(固城城)이라고 명명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안에 대해 늘 안타깝게 여긴 향토사연구소는 수년간 심의 논의한 결과 고성읍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왜성이라는 명칭을 읍성으로 바꿔 줄 것을 건의해 도로부터 명칭 변경이 확정된 것이다.
앞서 하기호 향토사연구소장은 ‘고성읍성과 고성왜성의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우리지역의 왜성을 포함한 18개의 성곽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과 체계화가 되지 못한데 대한 잘못된 견해를 바르게 밝혀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바 있다.[2]
문화재 자료 제89호로 지정된 ‘고성성지’의 명칭이 일본의 잔재라는 하기호 고성향토사연구소장의 지적에 따라 ‘고성읍성’으로 변경됐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후 장기주둔을 목적으로 조성한 ‘고성성’이 문화재로 지정돼 명칭이 변경돼야 한다는 한 향토사학자의 주장에 따라 ‘고성읍성’으로 변경됐다.
<본지 2011년 10월 28일자 1면 보도>
고성문화원 부설 고성향토사연구소 하기호 소장은 지난 2004년도부터 수 차례에 걸쳐 고성군과 경남도에 명칭 변경을 요구해 왔으나 의견이 수렴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10월 14일 또다시 고성군에 명칭변경요구안을 제출, 경남도 문화예술과에 접수되면서 이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됐다. 경남도는 지난 23일 하 소장의 문건과 관련 지정문화재 명칭변경신청에 대한 제2011년 제4회 사적·매장문화재분과위원회를 개최, 가결됐다. 이날 심의결과 기존의 고성성지를 고성읍성과 고성왜성으로 명칭을 각각 분리하고 왜성은 별도 지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군은 행정예고 후, 확정심의를 거쳐 문화재자료 제89호(1983년 12월 10일)로 지정돼 있는 ‘고성성지(固城城址)’를 ‘고성읍성(固城邑城)’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이같은 결과는 한 향토사학자가 고성읍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얻은 값진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하기호 소장은 “문화재 명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수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름 속에는 역사와 과정, 그 지역의 정체성까지도 함축돼 있다”며 “‘고성성’은 일본의 잔재인 만큼 우리의 성인 ‘고성읍성’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은 마땅하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고성군은 읍 중심지 4개리(성내리, 서외리, 수남리, 동외리) 안에 고성읍성과 고성왜성 등 2개의 옛 성이 있다. 지난 1983년 12월 10일 이 두 문화재를 합해 ‘고성성지(固城城址)’라는 명칭으로 경상남도 지방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하기호 소장이 각종 문헌을 근거로 ‘고성성’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들이 장기주둔을 목적으로 남해안에 쌓은 30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며, 1597년부터 1598년 사이에 일본의 왜장 깃카와 하로이에 등에 의해서 축조돼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해 왔다. 고성성지를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국 일본이 쌓은 왜성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명칭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3]
각주
경상남도고시 제2013-81호,《경상남도 문화재자료 명칭변경 고시》, 경상남도지사, 2013-02-28
고성성지 명칭 고성읍성으로 바뀐다 향토사연구소, 왜곡된 문화재 지정 정체성 확립위해 건의 "일본군이 쌓은 왜성 문화재 지정 정체성 없다" 고성미래신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문화재 ‘고성성지’ 일본 잔재 ‘고성읍성’으로 명칭 변경 하기호 소장 6년간 고성군 경남도에 꾸준히 문제 제기, 성과 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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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
고성읍성 (固城邑城)
수량/면적 32,060㎡
지정(등록)일 1983.12.20
소 재 지 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리,서외리,수남리일대
상 세 문 의 : 경상남도 고성군 문화관광과 055-670-2224
가야 말로왕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는 고성성지는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고, 고성읍성과 고성 왜성터의 일부가 남아있다.
고성읍성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둘레 3,524척, 높이 15척이며, 우물이 14개 연못이 1곳 있다고 전하나,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었다.
고성왜성은 정유재란 때 왜군이 남해안에 주둔하기 위해, 남해안 일대 요충지에 쌓은 성의 하나로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전체적인 구조나 규모를 알기 어렵지만, 주변에 있는 송학동고분군(사적 제119호)이나 고성 동외리 조개더미, 만년사 토성과 관련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곳에 가야 때부터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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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읍성의 성문(城門)
남문(南門) : 철성남문(鐵城南門)
서문(西門) : 고자서문(古自西門)
동문(東門) : 진동문(鎭東門)
북문(北門)은 다른 여러 고지도(古地圖)에는 없으나 1872년의 <조선후기지방지도(朝鮮後期地方地圖)>의 경상도 지도 중「고성부지도(固城府地圖)」는 북문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횡묵(吳宖默)부사의 <고성총쇄록(固城叢錄)>에 의하면 북문(北門)은 유허(遺墟)만 있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에 설치되었다가 곧 없어진 것으로 추정.
고성읍성의 주변 마을 이름
읍성(邑城)의 안쪽은 성내리(城內里)
읍성(邑城)의 바깥은 동쪽이 동외리(東外里)
서쪽과 북쪽이 서외리(西外里)
남쪽이 수남리(水南里)
---
읍성의 서쪽은 지금의 서외리 5거리에 서문(西門)이 있었던 곳,
서문(西門)밖을 옛사람들은 “서음 밖”이라 하였는데 지금 법정 리 동 명이 서외리(西外里).
읍성의 동쪽은 지금의 읍사무소 도로변에 동문(東門)이 있었던 곳으로 동문 밖을 옛사람들은 “동음 밖”이라 말을 하여 왔었는데 지금의 법정 리 동명이 동외리(東外里).
읍성의 남쪽은 남문(南門)이 있었던 곳으로 남문 밖을 옛사람들은 “나음 밖”이라고.
지금은 수남리(水南里) 남외(南外)마을이 있다. 이 남외(南外)마을은 지금의 군청 뒤에서 수남리 낮은 곳의 마을에 해당.
남쪽의 남문에서 약간 동쪽으로 떨어진 곳인 지금 수협에서 어시장 서쪽 길을 따라 구암 마을(옛 읍전포)로 내려가는 경사진 곳에 수문(水門)이 있었다고 하며 이 수문(水門)밖을 옛 사람들은 “수음 밖”이라 불러 왔으며, 지금의 수남리(水南里) 수외(水外)마을.
읍성(邑城)안의 지금 군청이 있는 자리는 조선시대 관청인 아사(衙舍)가 있었고, 군청 본건물이 있는 자리는 남을 바라보는 (子坐라고 함) 지방관의 수령(守令)의 집무실이 있었던 동헌(東軒)건물이 있었던 곳.
동헌(東軒)의 북동쪽으로는 객사(客舍)가 있었다. 객사(客舍)는 궐패(闕牌)를 모시어두고,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는 집이며, 또한 일반관리들도 객사에서 묵게 했던 곳.
객사(客舍)북쪽에는 연못이 있었고 1900년 경자(庚子)년에 객사(客舍)에 불(火災)이 났었고 당시 조유승(曹有丞)군수는 객사 화재로 일시 해직 당하였고,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日帝)의 강점(强占)하에 들어감으로써 객사(客舍)건물은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였고 객사(客舍)뒤에 있었던 못(池)도 메워져서 그 곳 넓은 터에 시장(市場) (5日場) 형성.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의하면 읍성 안에 우물이 4개가 있는데 3개의 우물은 동절기에 잘 마르나 하나는 겨울과 여름에도 잘 마르지 않는다 (井泉四內三冬節渴 有軍倉 一冬夏不渴)고 기록 되어 있다.
고성읍성의 우물
고성읍성(固城邑城)은 조선 중종(中宗)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그 둘레가 3,524척(尺)이며 높이가 15척(尺), 읍성 안에 4개의 우물과 1개의 못(池)이 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가뭄 때에는 용수가 귀하기 때문에 영조 때에 와서 다시 못을 하나 더 판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지금 군청 뒷마당 또는 그 뒤쪽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물은 4개 처가 있는데 지금 천주교회 앞 학우사 (學友社)옆에 창거리정 (倉巨里井)이 있다. 읍성 서북쪽 편에는 창고(倉庫)가 있었는데 이 창고(司倉, 西庫, 東庫)로 통하는 골목길이 지금 학우사 뒤로 통하는 길로서 옛 사람들은 이 골목길을 '창거리'라고 하였다.
이 창거리에 있는 우물 이름이 '창거리 새미(倉巨里井)'이다. 고성읍사무소 서편으로 고성교회 동편으로 골목길이 있는데 중간에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우물은 은성정(隱城井)이라고 하는데 옛 사람들은 '숨은 새미'라고 하였다.
또 하나의 우물은 읍성의 서남쪽 끝에 옛날 옥골이라는 마을로 지금은 신기 - 남포간 새 도로가 개설 되어 남서쪽 성벽 가까이에 '옥천정(玉泉井)'이라는 우물이 하나 있다.
또 하나는 어시장(魚市場)안에 우물이 하나있는데 '어시정(魚市井)'이라 부른다.
이렇게 4개의 우물이 읍성(邑城)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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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송학동고분군(固城松鶴洞古墳群)
경상남도 고성군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사적
송학동 고분군에 대한 시굴조사와 발굴조사가 1999년과 2000∼2001년에 걸쳐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어 고분의 성격이 밝혀지게 되었다.
먼저 고분군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시굴조사에서 한·일 양국간에 관심의 대상이었던 제1호분이 일본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아니라 3기의 원형고분이 중첩해서 연접된 것임이 밝혀졌다.
발굴자는 송학동 제1호분이 소위 전방부가 둥글다는 점과 여기에 대형의 돌방(石室)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방후원분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송학동 고분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실시된 1호분의 발굴조사에서는 시굴조사시 확인된 3기의 중첩봉토분을 A·B·C호분으로 명명하고 조사하였다. 봉토는 모두 먼저 분구를 조성하고 이를 다시 파서 묘를 축조한 영산강유역과 연결되는 분구묘임이 밝혀졌다.
가장 남측에 먼저 조성된 A호분에서는 주축을 전체 봉토의 장축과 엇갈리게 배치한 길이 10m, 너비 1.4m인 1기의 구덩식돌덧널(A-1호)을 중심으로 9기의 소형 돌덧널들이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었다.
같은 고성지역의 주변에서 조사된 내산리 고분군에서도 2기의 주된 돌덧널을 중심으로 소형의 돌덧널들이 돌아가며 배치되었는데, 이러한 유구의 배치모습이 소가야 또는 고자국(古自國)이라 부르던 이 지역 삼국시대 정치체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었지만 목긴항아리, 구멍이 있는 작은 항아리(有孔廣口小壺),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마구류 등이 잔존하고 있었다.
A호분과 약간 떨어져서 북측에 조성된 B호분은 중앙에 대형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 : B-1호분)을 배치하고 그 옆에 소형의 구덩식돌덧널 1기를 배치한 것이다.
중심 묘인 B-1호묘는 길이, 너비, 높이가 6.7×2.0×1.58m의 돌방 서쪽 단벽 중앙에 3.15×1.0×1.48m의 널길(羨道)을 가진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밝혀져 주목되는 한편, 널길과 돌방 내부의 천장을 비롯한 네 벽에 붉은색으로 도장한 채색고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특징은 가야지역의 구덩식돌덧널무덤의 유구 축조수법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며, 여기에 부장된 유물은 굽다리목긴항아리, 큰항아리, 입큰잔, 뚜껑접시 등 토기류가 대부분이고 금속류는 대부분 도굴시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A호분과 B호분을 연결하여 중앙에 조성된 C호분에서는 역시 입구를 서쪽에 둔 활(穹륭狀)천장으로 5.6×2.6×2.4m인 굴식돌방무덤 1기가 축조되어 있었다.
이 돌방은 서남부 가야지역에 처음에 조성되던 세장한 장방형의 돌방으로 알려져 있다.
특징이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의 특징은 B-1호묘가 서쪽에 널길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이라는 점과 돌방 내부가 모두 채색된 고분이라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가야지역은 물론 삼국시대 고분에서 처음 발견된 자료로서 당시 삼국시대고분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이런 채색고분은 일본의 큐수지방과 칸사이지방 고분시대의 고분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있어서 앞으로 한·일간 고분연구에서도 크게 이바지 할 것으로 생각된다.
돌방의 구조상으로는 재지 가야지역의 구덩식돌덧널과 서쪽에 인접한 백제지역의 굴식돌방의 특징이 혼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부장된 유물의 특징에서는 신라와 일본과도 교류한 흔적이 있다.
이들 특징을 참고한다면 대략 6세기 전반에 축조된 고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A호분에서 출토된 '하소오'라고도 부르는 유공광구소호와 뚜껑접시 등은 일본이나 백제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많이 닮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분의 축조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로 보인다.
송학동 1호분은 우선 위치상 소가야지역 대표 대형고분이며 남북으로 쌍분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에 연결된 봉토를 구성하여 마치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아 전방후원분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나, 상례적으로 중앙에 가장 나중에 축조된 봉토가 가장 높아야하나 B호분과 C호분이 마치 전방후원분처럼 A호분 보다는 낮고 평탄하게 조성된 점에서 C호분의 축조시에는 전체적인 봉토형태의 결정에 일본 전방후원분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의문이 간다.
송학동고분군의 규모나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소가야 또는 고자국으로 불리던 정치체의 왕릉급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 피장자들이 주변의 제국들과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성송학동고분군(固城松鶴洞古墳群)]





교통편 참고 : '버스타고'앱과 '시외버스티머니'의 정보가 부분적으로 다르다.
07:00 Ex
고성 매표하니 7분 여유
버스기사 "고성은 남마산에서 30분을 기다리니 남마산까지 가서 고성행은 따로 타는 게 빠르다."
몰랐던 정보다.
2시간 예정이니 9:40까지 도착하겠지.
07:42 출발
08:32 남마산 도착해서 정차 후
약 30분 정차, 화장실, 노선정보 탐색
09:00 남마산 출발
(09:42 고성 가는 차가 중간에 있다. )
부산에서 고성 갈 때는 남마산까지만 매표하라.
10여 분 빠를 수 있으니...
09:50-12:30 전구간 도보 답사
12:34 차가 있네.(시간표 보고는 13:00 탈 생각했는데)
시간표와는 다르게
시간표는 12:15, 13:00인데...
14:30 사상터미널도착/2시간에 맞춤
14:41-57사상-수정
15:13 귀가
교통비 총액 23,200=11,000+11,00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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