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구산면 옥녀뵹, 금주산, 옥계리야산 20210317 수 솔로(R&K)
코스 : 구산면 장구항-옥녀봉(176m)-반동소류지-할미당고개/반동주유소-신촌삼거리-신촌마을회관-금주산(96m)-신촌지-잘패고개/배수지-옥계리야산(207m)-신촌마을회관-반동-장구항 <15.2km/6:00>
06:30 가출
06:50 종가에서 합류
08:02 장구항 도착/출구 잘못으로 8분 정도 지체된 시간
08:06 장구항 돌아보고 출발, 저도 조망
08:14 들머리/도로에서 무덤길
여기서 우로 더 가서 길 찾는 게 옳을 듯
08:18 진달래가 만개하여 감동
08:40 삼각점, 옥녀봉 정상(176)
08:51 기암/보성오봉산의 독수리바위 닮음, 부엉이바위라 할까.
09:11 160m봉, 지난 토요일의 봉화산 조망
09:31 반동소류지
09:37 반동경로당
09:50 구복삼거리
09:52 구산교회입구
09:53 반동주유소
09:55 할미당고개 신당 입석
09:56 정자
10:07 용천사입구, 회전로타리
10:15 신촌경로당
10:17 정자
10:20 금주산길들머리
10:33 금주산정상
여기서 계획 변경, 처음에는 금호산방향을 생각했으나 옥계리야산으로 가서 도보로 원점하기로, 버스 만나면 타고...
능선길이 비교적 무난함
마지막 내려가는 길에 약간 길이 희미함
11:17 신촌지
11:20 성주이씨묘역/웅천현감묘
11:32 잘패고개,배수지
[백령고개2.4, 봉화산2.6]
이정표의 방향이 이상한데, 옥계리야산을 경유해야 2.6km.
12:16 고개 안부 사거리, 간이의자, 그네
12:26 옥계리야산(207m)산불초소
12:32 삼거리/봉화산갈림길
12:56 안부에서 우측 하산길 이용
-여기서 우측 하산길 트랙이 그려져 있는데, 직진하여 능선을 타고 반동에 있는 구남 중학교로 넘어갔다면 오히려 하산길의 가시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거리도 단축하고,
하산길은 반듯하게 임도 비슷하게 나 있는데 가시가 덮고 있어 헤치면서 나오는 게 힘들다.
마을길까지의 거리는 길지 않고 내리막길이라 편하기는 하다.
구남중학교방향으로 길을 잡지 않은 게 아쉽다.
13:06 산길을 끝내고 아름목장
아름목장 부근에서 장구항까지 거리를 계산하니 약 4.3km 정도, 도중에 버스를 만나면 탈까 했는데, 시간을 보니 곧 종점에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다.
버스는 기대를 접었다.
혹시 택시라도 오면 탈까 했는데, 한 대 오기는 왔다.
옆 좌석에 한 사람이 타고 있었지만되돌려 세워주기에 물었더니 장구항으로 가자고 했더니, 가는 길이 다르다고 한다.
남은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걸어가기로 굳힌다.
그런데 버스가 한 대 온다,
할미당고개 부근에서 만났는데 그 버스는 61번이 아니다.
64번인가..방향이 다르다,
우리는 곧 우회전해야 하는데 직진한다고..ㅎ
걸어가면 좋은 점도 있다.
주변 지형과 갈 산의 형세를 살피기도 하고 사람 사는 모습도 보고...
14:09 결국은 한 시간을 걸어 장구항에 도착한다.
================
해양드라마세트장으로 이동
14:37-15:07 : 30분
다음에 천천히 전체를 볼 기회를 마련하기로 작정하고..
16:20 귀가
옥녀봉, 금주산, 옥계리야산 트랙파일 첨부 :
옥녀봉 가기 위해 주차하기 좋은 곳은 장구항, 정상 갔다가 되돌아 내려온다면 좋을 듯.
정상까지는 등산지도에 트랙이 있으나 이후 트랙이 없지만 등고선을 보고 능선을 따라 트랙 만들어 160m봉 부근에서 반동리 소류지방향으로 하산 코스 잡음
역시 해안은 수려하다.
좌로 고개를 돌리니 저도 옥녀봉이 보여..
등산트랙은 여기, 그러나 400m 정도 더 내려가면 편한 길이 있을 듯하다. 물론 이 길도 좋았지만...
누군가 먼저 이 길로 옥녀봉을 오른 후 등산지도에 등록이 되었지만 이 길은 묘도 입구일 뿐.
등고선을 따라 그리면 여기서 더 내려가서 올라가는 길이 있을 것... 들머리 길도 있으니...
거기서 올라온 길이 더 발길의 흔적이 많았다.
지난 토요일의 심리 앞산 보다 진달래가 훨씬 많고 싱싱하고 활짝 피었다.
봄을 맞이하는 상춘객을 환영하는 듯.
옥녀봉 정상에는 다른 표지가 없다. 올라오는 동안에 진달래 카페트를 지나온 느낌이다.
이 돌의 생김새가 오봉산의 독수리바위를 흉내낸 듯하나 그에 못미친다.
앞의 우측 봉우리가 봉화산, 마산카톨릭교육관이 있는 곳이다. 육안으로 시설물들이 식별된다. 좌는 옥계리야산
반동마을 내려오기 전, 반동소류지에도 못미처 둘레석을 자연석으로 둘린 작은 무덤 '가선대부 양용위 부호군 월성최공'
반동리부녀회관에는 깃대가 비어 있다 바로 앞의 경로당에는 국기가 달려 있었고...
상추 밭에 윤이난다.먹음직스럽게...
반동삼거리
구산교회 앞 반동삼거리 정류장
머위
구산교회는 우측길, 이 좌측길로 넘어가도 될텐데...
여기 할미당고개 입석을 보겠다고...
할미당고개 신당, 신당은 보이지 않고 돌에 새긴 글만 있다.
할미당고개라는 명칭은 다음지도에도 나타난다.
정자가 오랫동안 관리 부실, 난간이 떨어지고 있고 바닥 나무도 꺼졌다. 올라가기가 불안하다. 아래에서 보고 나온다.
금주산(96m)
신촌지, 뒤돌아 도로 건너편에 비석이 화려하여 잠시 가서 본다.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이름이라 사진을 담아왔다. 조선왕조실록과 난중일기 검색에서는 웅천현감으로 검색했는데....
통훈대부 행웅천현감겸 병마절제도위
병산선생 성산이공 명신 신도비
통훈대부[通訓大夫]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삼품의 하계(下階)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보다 아래 자리로 당하관(堂下官)의 최상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 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 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해당 관직으로는 종친부(宗親府)·돈령부(敦寧府)·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군자감(軍資監)·장악원(掌樂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선공감(繕工監)·사도시(司imagefont寺)·사재감(司宰監)·제용감(濟用監)·내자시(內資寺)·사섬시(司贍寺)·예빈시(禮賓寺)의 정(正), 의빈부(儀賓府)의 부위(副尉)·첨위(僉尉), 규장각(奎章閣)의 직각(直閣), 교서관(校書館)의 대교(待敎),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직제학(直提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報德)·겸보덕(兼輔德),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좌유선(左諭善)·우유선(右諭善), 성균관(成均館)의 좨주(祭酒),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 승문원(承文院)의 판교(判校), 통례원(通禮院)의 좌통례(左通禮)·우통례(右通禮), 사옹원의 제거(提擧), 팔도(八道)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 등이 있었다.
직각, 대교, 직제학, 편수관은 모두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숙인(淑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
충무공의 난중일기에는 웅천현감에 대한 기록이 상당수가 나타난다.
실명으로 웅천현감을 나타낸 것은 3회이다.
임진년(1592)08.27 웅천현감 이종인(李宗仁)
갑오년(1594)04.06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
병신년(1596)05.20 웅천현감 김충민(金忠敏)
다른 표기로는 '웅천현감', 또는 '웅천'으로 여러 차례 나타낸다.
갑오년(1594)8.5 웅천(현감), 소비포(권관), 영등포(만호), 윤동구(尹東耉) 등이 모두 선봉장으로 여기 왔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웅천현감 중에 이운룡의 기록만 원균의 장계를 통하여 볼 수 있다.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8일 임자 6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경상 우수사 원균의 전황에 대한 장계
경상 우수사(慶尙右水師) 원균(元均)의 장계에,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장문포(場門浦)에 둔거(屯據)한 적세(賊勢)와 접전한 절차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2일 평명(平明)322) 에 다시 장문포에 진격하였는데, 전보다 약간 많아 무려 백여 명이나 된 것이 필시 둔처(屯處)한 왜병을 청원(請援)한 것이었습니다.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모여 있으면서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무수히 총을 쏘아댔는데, 우리 병사들이 강개(慷慨)하여 진퇴(進退)하면서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조금 물러나 외질포(外叱浦)에 진을 쳤습니다. 3일 진시(辰時)에 주사(舟師)323) 를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의 강 어귀에 줄지어 세워 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城)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矢石)을 피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가 주먹만 하였고 3백여 보(步)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설비(設備)는 매우 흉험(兇險)하였습니다. 적진 근처에 마초(馬草)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신은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守直)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습니다. 문제는 육병(陸兵)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주사(舟師)로서는 다시 어떻게 끌어 낼 방법이 없어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신(臣)은 다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육병장(陸兵將) 곽재우(郭再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에게 상의하여 수륙(水陸)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巨濟) 출신 사수(射手) 15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고 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陸戰)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일을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4일 묘시(卯時)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 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승자총통(玄勝字銃筒)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精銳船)을 영등(永登)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육병장 등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가서 직접 형세를 고하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서 7일에 돌아갔고, 신 및 주사(舟師)는 그대로 외질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5일 휴병(休兵)할 때에 신이 거느린 사후선(伺候船)324)을 장수를 정하여 정심포관(廷深浦串)으로 보내 적병의 동태를 급히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6일 묘시(卯時)에 사후장(伺候將) 원사웅(元士雄)과 조준표(曹俊彪) 등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사후선 4척이 편대를 지어 거제의 오비질포(吾非叱浦)에 도착하여 적선 2척을 만났는데 기를 잡고 돌진해 들어가니 왜적의 반은 이미 육지에 내렸고 배를 지키던 적병도 우리 배가 돌진해 감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문장(守門將) 김희진(金希進) 등과 있는 힘을 다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맞아서 다친 왜병이 상당히 많았는데 배에서 내린 적병 30여 명이 총을 쏘면서 지원을 해와서 수급(首級)을 베어오지는 못하였으며, 적선 2척과 기타 실려있던 잡물(雜物)은 모두 불지르고, 막풍석(莫風席)·물통·낫·도끼·노(櫓) 등은 싣고 왔다.’ 하였습니다. 다시 타다 남은 적선을 가지고와서 증거품으로 하라고 하였더니, 7일에 돌아와 고하기를 ‘오비질포에 도착하니 왜적 5∼6명이 길을 잃고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뭍에 내려 활을 쏘면서 추격하자 적의 무리가 산골짜기로 흩어져 도망을 쳤는데, 그중에 한 명이 다급하게 되자 칼을 풀고 항복하기에 사로잡아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의 중위장(中衛將)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6일에 행군하여 왜적이 숨어 있는 해변에 복병하고 있으면서 출몰하는 것을 엿보아 재빠르게 배를 움직여 돌진해서 1명을 생포해 왔고, 선봉장 웅천 현감(熊川縣監) 이운룡(李雲龍)은 적진에 달려들어가 왜인이 쓴 작은 판(版)을 탈취해 왔는데, 판본(版本)은 통제사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한산(閑山)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지휘하였습니다."
==================
난중일기에 개명에 대한 이야기가 2건 나온다.
정유년(1597)5.3 충무공 이순신이 아들 '울'을 '열'로 개명함
같은 해, 같은 달인 5.3 '조종'이 '연'으로 개명
난중일기에 표기된 이름 중에 인명이 바뀐 사례도 있는데, 정유년의 일기에 '임업'은 '서'의 초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혹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조선 시대 종6품 외관직(外官職) 무관(武官)으로 각도 제진(諸鎭)의 장(將)이 되었음. 그러나 실제로는 동반(東班)의 수령(守令)인 현령(縣令)•현감(縣監)이 겸대하였으며, 조선 초기의 병마단련판관(兵馬團鍊判官)이 세조 12년(1466) 1월의 관제 경정 때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개칭되었음.
[네이버 지식백과] 병마절제도위 [兵馬節制都尉]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선조실록 182권, 선조 37년 12월 23일 무진 3번째기사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헌부가 대사헌 권협·장령 조탁의 출사를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장령 조탁(曺倬)은 ‘신이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너무 많은 듯하다. 각 사람의 이름 밑에 그 사유를 기록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고 하고, 또 「대간(臺諫)에게 보이라. 」고 하였으니, 사실을 조사하여 허위를 없애려는 성상의 뜻이 지극하다. 신이 10월 3일 도감(都監)의 낭청(郞廳)으로 계하(啓下)되었을 때는 호성 원종(扈聖原從)에 참록(參錄)될 사람의 범례가 이미 정해져 마감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당초 어떻게 해서 그렇게 결정됐는지 곡절은 미처 알지 못하였지만 군졸(軍卒)이나 복례(僕隷)같은 천인들까지도 함께 수록되었고 또 거주지와 공적 사실도 적혀 있지 않아서 뒷날 허위와 사실을 다시 증빙할 길이 없었으므로 녹공(錄功)하는 규정이 자세하지 못한 듯 하였다. 그래서 각자 이름 밑에 공적과 거주지를 일일이 기록하여 따로 한 권의 책을 만든 다음 훈부(勳府)에 보관해 두었다가 뒷날 참고 자료로 할 것을 신이 전일 당상(堂上)에게 품하였더니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이 마침 질병으로 정고(呈告)하였다가 곧바로 본직에 제수되었으므로 미처 책을 만들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제 주상께서 전교를 내리시게까지 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다. 더구나 신이 이미 낭청이었으니 녹공의 외람된 폐단을 살피지 못한 죄를 신 또한 면하기 어렵다. 상께서 대간에게 보이라고 하신 것은 앞으로 그 사실을 조사시키려는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그 조사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을 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메모해 둔다.
잘패고개의 배수지
잘패고개, 백령고개까지는 2.4km
벌써 피로한지 간이의자에 낮아 본다.
옥계리야산 정상, 동네 야산일지라도 잘패고개를 이어서 오는 길은 야산 이상의 멋이 있다.
옥계리야산의 산불초소
저 다리는 새로 난 5번 국도의 길이다.
180도에 가까운 파노라마 영상, 중앙의 금호산과 백령치를 담아내었다. 다음 기회에 갈 곳이라고...대중교통이 편할 것 같다.
장구항에는 주차공간이 제법 있는 편이다.
장구항 바로 앞에 마을회관이 있다.
=============================
겨우 짬을 내어 해양드라마세트장을 보고 왔다.
대중교통도 가능하다.
대충 보고 나오는데 주차장까지 왕복 30분이 걸렸다.
파도소리길 전체를 돌면 2시간 정도로 넉넉히 잡으면 좋겠다.
'樂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원 성산구 동구산(새방골산280m), 뒷산(268m),뒷산(230m),갈미봉(225m..) (0) | 2021.03.23 |
---|---|
양산 원동면 '중리동산', 밀양 삼랑진 '까치머리봉(시루봉)' 20210319 금 (0) | 2021.03.19 |
창원 구산면 천둥산-경각산 & 봉화산 20210313 (토) (0) | 2021.03.13 |
의령 용덕면 신덕산 20210309 (화) (0) | 2021.03.09 |
고성 구절산 철마산 20210306 토 (0) | 2021.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