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동대산 경주 삼태봉 20200901 화 솔로(K)
코스 : 호계역-동대산-기령/기령공원/공명선거공원-관문성-삼태봉-백일봉-봉서산-원원사-모화초등학교정류소
<대중교통 이용>
시간 사용 계획에 거의 차질 없는 이동이 되었다. 산행지가 광역시지역이었기에
06:45 집에서 출발, 버스로 덕천역
07:04 덕천역에서 3호선, 거제역에서 기장역
08:14-09:06 기장역에서 호계역
09:08-17:50 산행(호계역-모화초등학교 정류소)
17:55-18:28 412번버스, 퇴근시간이라 정체, 기차 시간 맞추기에 긴장, 그래도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산행 코스가 최대로 늘어져 처음 계획한 열차는 타지 못함
18:39-19:30 호계-기장 무궁화열차
19:44- 기장-거제, 거제-덕천-수정
21:00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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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 호계역에서 출발
09:28 홈골경로당
09:34 호계IC 옆의 작은 굴다리
09:36 호봉사
09:39 무진암
09:45 이정표
10:13 철탑
10:21 <119표지목동대산16, 해발377m>
10:26 [홈골2.9/20', 마동재1.6/24']
10:26 <119표지목동대산15, 해발414m>
10:27 정상, 정자, 헬기장, 산불초소
<큰재정상/동대산447m>
10:29 소구부리재(큰재정상) 전망대
10:38 [홈골2.9/20', 마등재1.6/24']
10:45 [연지암 1.5]
11:04 철탑
11:06 마동재[동대산1.6/24', 연지암,매곡공단1.5/23', 신흥재1.6/24']
11:07 마동재비석,목장승2기 <119표지목동대산5, 해발426m> 임도로 진행
11:17 <보리수나무 20m→> 20m정도에 김녕김씨묘가 있다.
11:21 학성이씨 가족묘(납골당) 큰 비석4기
86년을 살다간 분의 '자찬묘지명'이 있다.
11:31 신흥사 갈림 이정표
[신흥재0.6, 마동재1.0/15', 무룡(정자)고개12.7, 신흥사↓]
11:40 [기령재0.9, 마동재1.0/15', 무룡(정자)고개13.5, 청룡암2.3, 평해사] 사방이정표
신흥재비석/이면에 매곡동 괴정재 지명
파군산(破軍山), 새미골, 괴정재(槐亭嶺), 가묘미뜽(假墓), 독매(獨梅), 찬물내기, 칼등, 무지골(舞知谷), 당미기, 소바탕, 서남산(瑞南山), 고깔산(梅峰山), 장군맥(將軍脈), 잘미기, 돌논
<매곡청년회>
임도 옆 축대에는 곳곳에 시가 있는 테마길이다.
14:45 [마동재1.6, 기령0.8, 약수임도입구1.1/17']
11:56 동대산테마임도 입구(차단기)
11:57 [신흥사1.7, 동대산정상4.1, 신흥재0.8, 무룡(정자)고개14.0]
12:02 기령(旗嶺), 삼각점(469.3m)(4차선도로 옆)
기박산성 안내판, 공명선거공원 조성에 대한 안내석
12:19 [동대산정상4.4, 이화초등학교3.5]
12:25-12:56 울산광역시와 경주시의 경계에 위치한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과 휴식
12:58 삼봉사 입구, 등산지도에서 삼봉사길과 도로 사이에 등로가 있어 사이길로 가다보니 인도..되돌아와서 삼봉사길로 10m 정도 가서 우로 오른다.
13:03 삼봉사길에서 우로 오름, 들머리가 정비되지 않았으나, 조금 더 가서 주찾ㅇ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13:05 주차장의 관문성 방향 이정표
13:10 관문성 안내판, 관문성
13:11 <삼태봉3.0→>
13:24 <관문성터입구0.9←>
13:25 <삼태봉2.2→> 성을 넘어 밖으로 산길 이어짐
13:43 [관문성1.9, 삼태봉1.6, 마우나오션리조트(테니스장B코스)0.6]
13:55 폐헬기장
14:03 [관문성3.0, 마우나오션리조트(C코스)0.7, 삼태봉0.5]
14:08 [삼태봉0.12, 관문성3.4, 허브캐슬1.96]
14:12 삼태봉 정상(629m), 삼각점, [관문성3.5]
14:19 [관문성2.6, 삼태봉0.3, 백일산(원원사지)2.4]
14:20 [삼태봉0.4, 원원사4.4, 양남면]
14:26 구 정상석[삼태봉0.6, 백일산(원원사지)2.1]
14:35 [삼태봉1.0, 관문성3.1, 원원사3.8]
14:39 진달래군락지
14:43 도로 만남[삼태봉1.6, 마우나오션..]
14:47 데크계단, 전망대, 경주풍력발전기전망데크
날씨관계로 100m 조망도 불가
14:57 [삼태봉2.4, 입실,등뒤재(봉서산)→]
15:18 철탑/백일산 부근
15:30 백일산(564.3m), 다른 표지나 조망 없고, 시그널만..
15:49 봉서산(571m)<외동영주아파트2.3, 시장,농협3.3>
16:24 바위
16:30 철탑
16:41 대숲 통과
16:42 경주원원사지 동서삼층석탑
16:46 방하착(放下着), 천불보전 계단 앞
16:50-17:15 탁족
17:25 모화저수지 제방앞
17:32 허브캐슬갈림길
17:50 모화초등학교정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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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덕천동 가는 버스 그 이후의 소요 경비
기차/기장-호계역 2,200원
버스/호계-모화초 1,250원
기차/호계-거제역 2,200원
교통비계 5,650원
콩국수 6,000원
총경비 11,6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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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시간 14:15 (산행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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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봉 GPX 트랙 파일 첨부 :
소구부리재(큰재, 장재)
호계동 수성마을 홈골에서 강동동 우음, 대안으로 넘어가는 재인데 재가 너무 험하여
옛날 소등에 나무와 풀을 베어 싣고 오르내릴 때 소가 구른다 하여 소구부리재 또는
큰산(동대산)이라 하여 큰재, 장재라고도 부른다.
신흥재 이면 표기
매곡동 괴정재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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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군산(破軍山), 새미골, 괴정재(槐亭嶺), 가묘미뜽(假墓), 독매(獨梅), 찬물내기, 칼등, 무지골(舞知谷),
방매(放梅), 당기미, 소바탕, 서남산(瑞南山), 고깔산(梅峰山), 장군맥(將軍脈), 잘기미, 돌논
<매곡청년회>
기박산성 의병제
이 곳은 북쪽으로부터 약 300m 떨어진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기백이재이다.
기박산성은 관문성과는 별도의 성으로 동쪽으로는 산세의 경사가 완만하여 왜구의 방어에 적절한 곳이며, 남쪽은 울산 동해 일원 및 서쪽으로는 울산광역시 북구 농소지역 일대를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다.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21년 서기 722년 10월에 쌓은 성으로, 삼태봉의 산마르를 둘러 싼 포곡식(包谷式)이며 길이는 약 1.8km나 된다.
이 성의 특이한 점을 살펴본다면, 홍수를 대비하여 배수구 3곳 및 성돌 하단부에 명문석(銘文石)이 10여개가 발견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기박산성은 성을 쌓는 그 둘레에 붉은 기를 꽂아 방행 및 거리를 표시하여 쌓은 것이므로 기(旗)의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본다.
기박산성은 임란 때 울산 선비 18인이 나라의 위란(危亂)에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하늘에 맹세하며 처음 결진편대(結陣編隊)하였던 곳이다.
이와 같은 공신의사(功臣義士)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매년 4월 23일 기박산성 의병 추모제가 개최되고 있다.
중산동 기박산성[中山洞旗朴山城]
중산동 기박산성은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 산 11번지 관문성의 동쪽 대점과 기령 사이의 산 정상부 해발 고도 502~583m 범위에 위치한다.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과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 산성
중산동 기박산성(中山洞旗朴山城)은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문성과 연관된 성으로 이후 고려 말 조선 전기에까지 이어서 사용된 것이다. 산성이 축성된 이유는 주로 왜로부터의 침탈을 막기 위한 것이다. 울산은 왜와 가장 가깝다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왜에 대한 방비가 대단히 중요하였다. 따라서 관문성과 함께 기박산성도 왜에 대한 대비책이라고 판단된다.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까지 이곳에 경상좌병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좌병영은 1417년에 지금의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성 자리로 옮겼다. 조선 말기인 1871년에는 경상좌병사 윤선응(尹善應)이 남문을 새로 설치하고 성곽 일부를 수축하였다. 중산동 기박산성은 함월산성, 신흥산성, 기박산성, 신대리성 등으로 불린다.
중산동 기박산성은 3개의 작은 봉우리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으로 지도상 전체 길이는 1,767m, 면적은 124,117㎡이며 가장 잔존 상태가 좋은 구간은 최대 높이 3.2m 정도로 성벽이 남아 있다. 석축 기법과 성내의 유물로 보아 7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체성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동쪽 성벽[조선시대 남문지-동문지]의 경우 상단부와 하단부의 축조 양식이 판이하게 다른데, 하단부의 경우 150㎝ 높이의 8, 9단까지는 길이 35~55㎝, 높이 30~40㎝의 다듬은 석재를 눕혀서 가지런히 쌓았는데, 가장 하단은 10㎝ 정도, 그 상부는 5~10㎝ 들여쌓기 하였다. 상단부 195㎝ 높이에는 20~60㎝ 크기의 할석을 정형성 없이 쌓아서 조악한 축조 수법을 보여준다.
중산동 기박산성의 성곽 유구로는 체성과 문지 5개소, 배수구 3개소, 건물지 14개소[추정 조망대 포함], 집수지 1개소, 명문석 10개, 조망대 등이 있다. 1995년에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지표 조사를 했고, 2015년부터 2016년에 걸쳐서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 측량 및 현장 정밀 조사를 수행했다.
중산동 기박산성은 울산의 임진왜란사 연구에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유적이다. 기박산성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항일 활동에 대한 재조명을 위해서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앞으로 기박산성에 대한 연구는 울산의 임진왜란사 연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산동 기박산성 [中山洞旗朴山城]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공명선거공원
참으로 아리러니다.
염원은 공명이었으나 과정과 결과로는 공명을 부정으로 바꾸어야 맞을 것 같은데...
네이버 지도에서 공명선거공원을 검색했는데 울산 뿐이다.
그런데 최악의 부정선거가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으니 부끄러운 줄이나 알아야 할 일 아닌가.
관문성[關門城]
사적 제48호/1963년 1월 21일 지정
울산광역시 북구 호계동,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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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년(성덕왕 21) 10월에 일본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침입 통로인 모벌군에 모벌군성, 즉 관문성(關門城)을 쌓았다. 관문성의 길이는 6,792보 5척으로 그 규모가 커서 후세 사람들은 신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렀다. 축성 공사에 동원된 인부 수는 3만 9262명이었다. 663년에 축조된 부산성과 673년 9월에 축조한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 쪽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영일만과 울산만에 상륙하는 왜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다.
관문성은 치술령 줄기의 남쪽에서부터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따라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의 동쪽 산 아래까지 뻗친 길이 약 12㎞의 장성과 해발 590m의 신대리의 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의 신대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주 주변의 성곽과는 달리 산과 산을 연결하여 축조한 장성 형식의 산성이다. 성문 터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국도로 인해 완전히 파손된 모화리 문지와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의 녹동리 문지가 있다. 모화리 문지의 경우 안쪽 일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편이 많이 수습되고 있어 문루나 문지와 관련된 창고나 병사들의 숙소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문성 석각에는 "골고가 맡은 남쪽 경계. 거칠산[군]이 맡은 북쪽 경계. 맡은 거리는 7보 1척/ 웅이 맡은 남쪽 경계. 골고가 맡은 북쪽 경계. 맡은 구역은 4보 1척 8촌/ □□군이 맡은 북쪽 경계. [이하 결락]/ 압탁이 맡은 남쪽 경계/ 금경의 원천모주가 짓는 북쪽 경계. 맡은 구역은 5보 5척 /금경의 도□가 짓는 북쪽 경계. 맡은 구역은 5보 5척/ 절화군이 맡은 북쪽 경계. 맡은 구역은 10보 2척 7촌/ 퇴화(退火)가 맡은 남쪽 경계/ 서랑군/ □□군이 맡은 구역 5보 □척의 남쪽 경계"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관문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8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관문성의 성벽은 20~50㎝ 정도의 자연석과 가공된 돌을 이용하여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줄어드는 물림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고 산지에는 내탁법(內托法), 평지나 골짜기에는 협축법(夾築法)으로 쌓았다.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할 때 성 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상부 시설로 북구 중산동에 복원된 여장 시설(女墻施設)이 있다.
현황
관문성은 산과 산이 연결되어 있고, 성 안에는 성문 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 자리·건물 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관문성은 신라의 대규모 축성 사업으로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 신라 수도인 경주를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삼국시대와 달리 수도의 방어가 잘 되어 있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으며, 그 외항인 울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관문성 석각에서 보이듯이 여러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하였던 점은 경주 남산신성비와 함께 신라의 역역동원체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문성 [關門城]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원원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1429호 (2005.04.07)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8-2, 산12-3
쌍탑의 경주원원사지삼층석탑은 사적 제46호 경주원원사지 안에 있다. 원원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밀교를 계승한 안혜ㆍ낭융 등이 김유신ㆍ김의원ㆍ김술종 등과 뜻을 모아 호국의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동ㆍ서 삼층석탑(높이 약 7m)은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31년 가을에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하였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양식으로 조성된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며, 하층기단 면석과 갑석 및 상층기단 면석은 각각 8매, 상층기단 갑석은 4매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층기단의 면석에는 2개의 탱주와 우주가 있고, 하층갑석의 상면에는 2단의 상층 기단 괴임이 있으며, 상층갑석 4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는데 이들의 머리는 짐승이나, 몸체는 평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며 옷자락이 하늘로 날리고 있는 형상이다.
1층 탑신석 이상 3층 옥개석까지는 모두 1매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층 탑신에는 우주가 있고, 4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 5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 괴임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과 앙화석이 남아 있다.
경주원원사지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 표현형식, 옥개석의 돌다듬기 수법, 기단부와 탑신부에 구현된 양식, 석재의 조립방법 등으로 보아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하층기단에서 십이지상을 최초로 배치한 점 등 석탑의 조각기술, 구조적 특징, 표현양식 등을 고려할 때 학술적, 미술사적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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