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닭벼슬산 운장산 조항산 태실봉(바깥태실, 안태실) 20200725 토 솔로 (R&L,K)
코스 : 상정천6교-닭벼슬산-상정천8교-일월선원입구-무덤옆 밧줄난간-운장산-조항산-태봉(외,내)-죽정-상정천6교
07:20 화명탑승
07:50 남양산 경유
09:36-09:50 선암사
10:10 이면 도로 주차후 산행 시작
10:23 임도 (사유지통행금지)
10:32 영일정씨
10:48 창녕이씨묘
11:07 닭벼슬산 삼각점
11:23 달성서씨묘/능선 따르다 되돌아 나와 임도로
11:43 임도 첫집, 파란지붕
11:54 금관기술센터앞 천변 데크쉼터/휴식
12:16 상정천8교, 블루벨리가압장
12:22 중산리 입석
12:27 일출선원 입석/일출선원길 탐색
12:38 무덤/흰색 밧줄난간 후 능선따라 좌회전 등로
13:01 통정대부 달성서씨묘
13:03 삼각점/운장산(230m)
13:21 철탑
13:32 철탑
13:43 창녕이씨묘
13:46 임도변의 산골장흔
13:55 태봉 조망 능선/무덤/
여기서 통신탑이 보임, 직선거리 약 500m, 조항산,
조항산을 먼저 다녀오기로 함
14:01 무덤/달성서씨
14:06 [조항산, 장기, 금광]
14:07 MBC포항문화방송 조항산 송신소
14:08 KBS 조항산송신소
14:09 조항산(鳥項山)해발___
14:12 포항항공무선표지소
14:21 [조항산, 장기, 금광]
14:24 무덤/달성서씨
14:33 가선대부평산신씨묘/삼각점
14:44 태봉(바깥태봉231.3m)
14:58 안태봉(214m)
15:34 계곡절개지
15:41 습지대 개활지
15:48 임도 대숲길
15:50 죽정길, 철거폐가들
16:15 봉학사입구
16:20 고개/본래 계획된 등산로 횡단
16:31 블루벨리서로 교차로
16:37 선암사 입구 진입로
16:38 상정천6교
16:42 주차원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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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문화관은 시간관계로 포기하고
약 8km 정도 귀가 방향에 가까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으로 이동
17:03-18:05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신라마을-쌍거북바위-귀비고-부암정-산마루정자 가는 길(등산로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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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시장.삼형제회대개
18:4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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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9 신해운대역-거제역-덕천역-화명역
22:35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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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들어야 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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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의 동해면과 구룡포읍의 경계 부근에 위치하는 5개의 산 운뇌우광닭[운장산(234), 뇌성산(212), 우성산(211), 광정산(199), 닭벼슬산()]을 선답자의 트랙과 지도에 표시된 트랙을 참고하여 가는데 전체 거리가 내 체력 기준으로 볼 때 길어 반 정도로 줄이면서 태봉을 포함하고자 했는데 태봉 전망 삼거리에서 바로 앞에 직선거리로 500m 정도에 통신시설이 보이는 산이 바로 호미지맥상의 조항산이라 잘 닦인 길을 따라 통신시설들이 모여 있는 정상부까지 갔는데 정상 안내는 도로변에 조항산 정상이라는 금속판의 표지 하나만 있고 실제 주변은 시설구역에 갇혀 있었다.
울타리를 따라 좌로 돌다가 우거진 가시의 장애로 되돌아 나왔다.
들머리를 찾을 때 보통 마을회관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일이 많은데 네이버와 다음의 지도에서 부근을 살펴도 온통 도로 뿐이다.
지도는 완전히 바뀐 셈이다.
이 지역은 블루벨리 산업단지로 특화된 곳으로 새로운 도시로 거듭난다는 계획이다.
차량 통행이 적으니 도로변에 적당히 세울 수 밖에 없다.
현재 별도의 주차공간들이 만들어져 있지도 않은 상태다.
옛지도의 주택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구불구불 옛길은 직선화되어 아스팔트로 포장 되었다.
직선화된 도로를 따라 물길조차도 직선화한 것 아닌가 싶다.
도심의 운하를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하천의 양안은 시멘트 구조물 등으로 만든 경사면이 급하여 내려가서 물고기를 보거나 잡거나 하는 일은 꿈도 꾸기 어렵다.
daum지도를 확대하면 어떤 계획도시인지 짐작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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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홈페이지에 소개된 사찰(http://www.pohang.go.kr/phtour/9296/subview.do)들은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고석사, 법광사, 보경사, 선암사, 오어사, 일출선원, 임허사, 죽림사, 천곡사, 해봉사 등이다.
시간관계로 산행 시작 전에 차를 타고 선암사를 먼저 돌아 보았는데, 2代에 걸쳐 지켜온 사찰인데, 토개공이 강제매입 하여 폐사 위기에 있다고 한다.
주변의 민가는 모두 철거되었고, 토지는 모두 깎아 개발하는 중인데 다음, 네이버의 지도를 보면 블루벨리 특화사업단지로 개발한다는 것.
선암사 측은 전통사찰 보전을 위해 법정 투쟁 중이라고 한다.
중산리의 중양서원(서씨서원)은 지도에서 확인해보면 점선으로 개발에서 제외되어 보존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는 힘이 좀 모자라는 걸까.
아니면 안쪽으로 돌아가신 박정희대통령을 모셨다는 것과 관계되는 걸까.
그도 아니면 외세를 입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왕손이라 그런걸까.....
둘 다 맞을 듯 하다.
아마도 이 개발 건에도 엄청난 비사가 숨어 있을 듯하다.
중양서원(서씨서원)은 상정천8교 건너편 산 아래 평지의 끝에 있다.
daum의 위성지도 상정천8교 앞에는 블루벨리로 절반에 토사가 쏟아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다리의 공사가 아직 진행 중이다. 콘크리트 다리의 그림자가 정북으로 짧게 있는 것으로 보아 정오 무렵에 찍힌 사진이다.
네이버의 이 부분 사진은 다음이 찍은 시기보다 후기이다.
다리를 이용하여 공사차량이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리 앞의 건물은 계획지도에서는 '상수도시설'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블루벨리가압장'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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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벼슬산(152m/이건 지도상의 위치에 있는 것이고, 선답자는 134m라고 했다. 등고선을 보면 거의 맞다.)
첫 코스를 닭벼슬산으로 잡았다.
닭벼슬산으로 잡은 것은 동편의 북에 가까운 산이다.
운장산은 오늘의 최북단이다.
그래서 절반으로 자르면서 닭벼슬산을 먼저 잡았는데, 지도상의 닭벼슬산은 삼각점이 있는 위치보다 남동으로 직선거리 약 700m, 아마 실제는 800m 정도는 족히 될 위치에 있었다.
지도의 오류일까. 아니면 선답자들의 오류일까.
후기에 나머지 구간을 탐방할 때 지도상의 닭벼슬산을 찾아보아야겠다.
어제까지 비가 내린 후라 산길이 매우 미끄럽고 질펀하고 물이 고인 곳이 많았다.
그래서 겨울에 가자고 했었는데...
달성서씨묘를 지나면서 등산로가 잘 보이지 않아 능선을 따르다가 도로 나와서 임도를 찾았다.
임도의 끝에서 마을길로 접어든 후에는 운장산 들머리까지 도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중양서원(서씨서원)으로 가는 길은 절개되었고 들판은 공사로 길도 없고 불편하여 멀지 않은 길이라 도로를 따랐다.
상정천변의 금관기술센터 앞의 데크 쉼터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나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일단 배낭은 덮고 비옷도 입었다.
도로를 따라 일월선원 입구의 안내입석까지 가서 주변을 잠시 둘러 보았다.
일월선원까지는 500m라 다녀오는 것은 포기했다.
아마도 일월이라는 말은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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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장산(234m)
등산지도와 달리 곧은 도로를 따라 가면 '중산리'라는 입석이 있고, 곧 이어 '일출선원'이라는 입석이 있는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우측 뒤로 무덤이 있고, 무덤 옆으로 밧줄 난간이 보이며 따라 가면 끝부분에 좌측으로 능선으로 올라가는 폭 2m 정도의 등산로가 경사면을 따라 올라간다.
갈은 좋으나 경사는 만만치 않다. 더위때문이 아닐까. 위험한 길은 전혀 아니며 잘 다듬은 길이다.
운장산에서 다음 코스인 뇌성산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선암산에서 월성산 선암사라고 했던가. 210m봉을 말함일까.
정상에서 약 1km 정도를 가서 우측으로 난 길이 더 좋았는데 그게 태봉으로 갈 수 있는 ㄱㄹ이며, 조항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산길에서 좌측으로 무덤이 있는 틘 곳에서 보니 앞에 태봉이 보인다.
그런데 바로 우측에 가까이 송신탑이 보였다. 그게 바로 호미지맥상의 조항산이다.
그 곳을 다녀와서 태봉으로 가기로 하고 먼저 그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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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산(246m)
조항산을 멀리서도 구별할 수 있다면 현재로는 송신탑들이다.
KBS, MBC, 한국항공공사 등의 통신탑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찾는 지표가 되겠다.
이 지맥을 따라 갈 일이 있으려나.
되돌아 나와 태봉으로 가는 길은 올 때 보았던 그 무덤 앞의 길로 올라갈 이유가 없다.
그 길이 결국은 아래로 내려와서 조항산에 이어지는 임도와 만나게 된다.
즉 임도가 능선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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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태봉(231)
태봉은 왕실의 태실과 관련된 이름일텐데 정상표지 등은 보이지 않고 시그널에 적힌 글 뿐이다.
여기도 임도에서 잠시 가파르게 올라가지만 그리 큰 힘이 드는 곳은 아니다.
정상에 돌탑 1기가 제법 큰 규모로 있다.
돌탑을 지나서 좌로 돌아 내려간다.
안부를 지나면서 올라가면 곧 안태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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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봉(214)
안태봉에는 파묘의 흔적 같은 게 하나 있다.
하산길은 되돌아 가는 길이 무난할 것 같다.
1km만 오던 길로 돌아 가면 본래의 트랙을 만날텐데 급한 마음에 지름길을 택했더니 처음에는 임도가 아래로 이어졌는데 나중에는 길이 잡목과 덩쿨에 막히면서 진행이 불가했다.
때맞추어 소나기까지 내린다.
이게 만일에 폭우가 되었더라면 계곡에서 어찌했으랴. 아찔하다.
그래도 되돌아 갈 수는 없고 내려갈 길을 찾았는데 무너진 절개면을 나무를 잡고 내려가는데 빗길에 미끄럽기도 하고 엄청난 조심..
날씨만 맑아도 좋았을텐데..
지름길 찾지말고 어지간하면 정해진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게 상책이다.
계획대로 되돌아 갔다면 능선에 붙는데 까지 30분이 걸리지 않았을 텐데..
내려서니 늪지대다.
비 때문에 신발이 물에 빠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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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를 만나면서 500여m 거리에 능선으로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옷이 다 젖어 그냥 마을길을 찾아 죽정리로 나갔다.
이후는 산길은 포기하고 계속 도로를 지났는데 우리가 계획한 등산로를 횡단하여 지났다.
도로는 등산지도상의 길과 맞지 않는다.
방향만 맞추어가면서 갈길을 찾을 뿐이다.
삼개면을 지났다.
구룡포읍, 동해면, 장기읍.
그러고 보니 영일만을 이루는 삼읍면을 통과, 다음 기회에 장기읍의 유물 유적들을 찾을 기회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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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선원
일출 선원은 일출암을 '재단법인 선학원'으로 등록하면서 선원으로 바꾼 것이다. 선학원은 한국의 전통 불교를 수호하고 일제의 사찰 정책에 대항하려 설립된 것으로 1922년 선우공제회를 결성하면서 선풍 진작과 청정 비구들의 자주 자립을 사명감으로 식민지 불교 정책으로 만연된 계율 파괴와 선 전통의 상실을 우려한 수좌들이 사찰령의 구속을 피하면서 일제 불교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설립되었다. 지금도 선학원 소속의 사찰은 사(寺)나 암(庵)이 아니라 선원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일출선원이 있는 운장산은 멀리서 보면 산봉우리가 구름과 같이 높이 보인다 하여 이름 지어졌고 이 산에 구름이 끼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운무장산'이라 부르다 지금의 운장산으로 바뀌었다 한다. 검푸른 암벽과 붉은 토양으로 우뚝 선 바위 밑에 자리한 절집은 본래 신라시대의 사찰터로 전해오다 1914년 경주 기림사에 주석하던 혜광 스님에 의해 인법당으로 중건된 후, 1972년 향곡 스님의 가르침을 받던 재가 불자들에 의해 대웅전이 세워졌다.
여느 사찰처럼 대작 불사는 아니지만 불사를 이끌던 사부대중의 신심과 수행만큼은 깊었다고 한다. 대웅전과 그 어깨 너머에 제비집처럼 위치한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는 산령각과 요사한 동이 이 절집의 전부이다.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이들이 조용히 기도하고 수행하기 좋은 토굴의 느낌이 드는 곳이라 하겠다. 현 주지이신 지현 스님께서도 1978년 법주사에서 공부하다 정진처를 찾던 중 이곳과 인연이 닿아 27년째 주지 소임을 맡고 계셨고 '사찰 불사는 사부 대중이 뜻을 모아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심으로 하는 것으로 좀더 불사의 서원이 모일 때 까지 기다리면서 부족한 절 살림이지만 대중 화합과 불교 포교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열심히 정진하겠다.'고 하셨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정동길 55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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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전에 찾은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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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에 자리한 대승불교관음종 소속의 사찰이다. 월봉산(月俸山) 자락에 감추어지듯 자리하고 있는 선암사는 외부로 한발자국만 벗어나도 내부를 볼수 없는 형국이다. 작은 규모의 가람(伽藍)으로 자연계곡을 따라 서 - 동 방향으로 전각(殿閣)을 배치하였고, 지형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은 북쪽의 높은 바위에 마련하였다. 바위 아래 남쪽 낮은 곳에는 용왕당(龍王堂)과 종무소를 배치하였다. 높은 전각 바위 아래로 작은 개울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계곡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사철 불어오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에 올라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면 높지도 낮지도 안은 봉우리들이 가람을 감싸 안듯하여 아늑한 분위기가 연출되며 평온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사찰을 창건하신 경명(鏡明) 스님의 뛰어난 손재주가 가람 곳곳에 베어있어 깔끔하며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전각을 모시는 북편 바위 생김새가 위와 아래는 밋밋하게 수직에 가깝지만 기묘하게도 가운데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마치 임신한 여성의 배처럼 생겼다. 그런 이유로 이 바위를 '임신바위'라고 부르며 실제로 이곳에서 치성으로 기도 드리면 아이를 갖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인근에 효험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또한 겨울이면 바위에 고드름이 길게 드리워지는데 그 고드름이 땅에 닿을 정도를 길게 되면 그 해에 풍년이 되고 짧으면 농사가 잘 안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정동길417번길 9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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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서 말하는 월봉산은 지도상에 표기되어있지 않았다.
창건주 경명(鏡明) 스님의 속성은 김씨일 것이다.
경순왕후손경명이라고 비석에 새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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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후손경명스님의 창건비..2대째라니 역사가 오랜 것은 아니지만 개발에 밀려 떠나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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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船岩寺)
부사과[副司果]
이칭별칭 : 여절(勵節), 병절교위(秉節校尉)
정의 :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종6품 관직.
내용 : 관계상(官階上)으로는 여절(勵節)·병절교위(秉節校尉)라 별칭되었다. 태종 때에는 섭부사직(攝副司直)이라 하였으나 오위체제가 갖추어지면서 1466년(세조 12) 관제개혁 때 종6품 부사과로 개칭되어 법제화되었다.
『경국대전』 당시의 정원은 176인이었으나 후기로 오면서 오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되자 그 수가 『속대전』에서는 1인, 『대전회통』에서는 6인이 늘어 183인으로 증가되었다.
후기의 오위는 무보직자(無補職者), 다른 군영(軍營) 및 여러 관청의 잡직 등에게 녹봉을 주기 위한 기관으로 바뀌어 부사과도 이러한 여러 다른 직종이 무직을 띠어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전회통』에서 부사과에 배정된 내용을 보면, 무보직자의 녹봉을 보장하는 원록체아(原祿遞兒) 35인, 친공신(親功臣) 5인, 승습군(承襲君) 2인, 공신적장(功臣嫡長) 7인, 훈련도감군병 6인, 금위영군병 1인, 내의원의원(內醫院醫員) 2인, 사자관(寫字官) 1인, 이문학관(吏文學官) 1인, 사역원역관 1인, 훈련원습독(訓鍊院習讀) 7인, 화원(畫員) 2인, 전의감습독(典醫監習讀) 1인, 관상감습독(觀象監習讀) 1인, 혜민서총민(惠民署聰敏) 1인, 치종(治腫) 1인, 수문장(됨門將) 1인, 포도군관(捕盜軍官) 18인, 금군(禁軍) 83인, 충의위(忠義衛) 2인, 금루관(禁漏官) 1인, 율학(律學) 1인, 영희전감(永禧殿監) 1인, 규장각감(奎章閣監) 2인 등으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사과 [副司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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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략장군[宣略將軍]
시행일시 : 1392년(태조 1) 7월
정의 : 조선시대 종4품 하계(下階) 무신의 품계.
내용 :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무산계(文武散階 : 문신과 무신의 품계)가 제정될 때 무산계의 상계는 선절장군(宣節將軍), 하계는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정해져『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장군계(將軍階)의 하한(下限)이다. → 무산계
[네이버 지식백과] 선략장군 [宣略將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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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산계(武散階)의 하나.
지방세력가와 공이 있는 평민, 천인들에게 무산계를 수여하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무신들에게 무산계를 수여하였다. 종4품의 무관을 상·하로 나누어 상에게는 정략장군(定略將軍), 하에게는 선략장군의 관계(官階)를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략장군 [宣略將軍]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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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종사품(從四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사품의 하계(下階)로서 정략장군(定略將軍)보다 아래 자리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중추부(中樞府)·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경력(經歷), 오위(五衛)의 부호군(副護軍), 훈련원(訓練院)의 첨정(僉正),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북한산성(北漢山城)·경리청(經理廳)·총리영(摠理營)·수어청(守禦廳)·관리영(管理營)·진무영(鎭撫營)의 파총(把摠), 금위영·어영청의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팔도(八道)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병마만호(兵馬萬戶)·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수군만호(水軍萬戶) 등이 있었다.
병마·수군동첨절제사의 일부는 예겸(例兼)하였다. 처(妻)에게는 영인(令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략장군 [宣略將軍]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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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산행을 종료하고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으로 ..
연오랑과 세오녀[ 延烏郞 細烏女]
원전서지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시대명 :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년인 정유(서기 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나타나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러자 이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
그리고는 연오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보면, 이 무렵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었다. 연오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정한 왕은 아닐 것이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세오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하고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 바위도 예전처럼 세오를 태우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왕에게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세오는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렸다. 일관(日官, 하늘의 조짐을 살피고 점을 치는 일을 담당한 사람)이 말하였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괴이한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왕은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오가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한 것은 하늘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오. 그러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 대신 내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곧 비단을 내려주었고 사신은 돌아가 이 일을 아뢰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이 났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으며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고 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도 하였다.
第八阿達羅王卽位四年丁酉 東海濱 有延烏郞 細烏女 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邊邑小王 而非眞王也] 細烏怪夫不來 歸尋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夫婦相會 立爲貴妃
是時 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稱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怪 王遣使來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今何歸乎 雖然朕之妃 有所織細綃 以此祭天 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네이버 지식백과] 연오랑과 세오녀 [延烏郞 細烏女]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일연, 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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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濱有延烏郞細烏女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負歸日本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동해빈유연오랑세오녀부부이거 일일연오귀해채조 홀유일암부귀일본국인견지왈 차비상인야
乃入爲王 細烏怪夫不來歸尋之見夫脫鞋 亦上其巖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奉獻於王 夫婦相會立爲貴妃
내입위왕 세오괴부부래귀심지견부탈혜 역상기암암역부귀여전 기국인경아봉헌어왕 부부상회입위귀비
是時新羅日月無光日者奏云 日月之精降在我國今去日本 故致斯怪王遣使求二人 延烏曰
시시신라일월무광일자주운 일월지정강재아국금거일본 고치사괴왕견사구이인 연오왈
我到此國天使然也今何歸乎 雖然朕之妃有所織細 以此祭天可矣 仍賜其
아도차국천사연야금하귀호 수연짐지비유소직세 이차제천가의 잉사기
使人來奏依其言而祭之然後日月如舊 藏其於御庫爲國寶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사인래주의기언이제지연후일월여구 장기어어고위국보명기고위귀비고 제천소명영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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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세오녀설화[延烏郎細烏女說話]
연오(延烏)와 세오(細烏)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일월이 빛을 잃었는데, 세오의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다시 빛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설화.
본래 『수이전(殊異傳)』에 전하던 것인데, 고려 때 『삼국유사』에 채록되었다. 이 설화는 단순한 연오·세오 부부의 이동설화가 아니고 고대의 태양신화의 한 원형으로 여겨진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 동해변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가 바닷가에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비상한 사람으로 여겨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 연오가 돌아오지 않자 찾아나섰다가 남편이 벗어 둔 신을 보고 그 바위에 오르니 바위가 또 세오를 일본으로 실어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 이 사실을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 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일월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버려 괴변이 생겼다고 하였다. 이에 국왕은 사자를 일본에 보내어 이들 부부를 찾게 되었다.
연오는 그들의 이동은 하늘의 시킴임을 말하고 세오가 짠 세초(細綃)로 하늘에 제사하면 다시 일월이 밝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사자가 가지고 돌아온 그 비단을 모셔 놓고 제사를 드렸더니 해와 달이 옛날같이 다시 밝아졌다. 비단을 창고에 모셔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으며,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陽烏傳說)의 변음으로 볼 수 있고, 세오도 쇠오, 즉 금오(金烏)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연오와 세오의 이동으로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 제사로 다시 광명을 회복하였다는 일월지(日月池)의 전설과 자취는 지금도 영일만에 남아 있다.
영일현의 영일(迎日), 즉 ‘해맞이’의 지명도 태양신화와 직접 관련이 있으며, 『일본서기』의 「천일창설화(天日槍說話)」도 같은 유의 광명의 신, 즉 태양신화의 이동전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과 일본의 이즈모[出雲] 지방은 역사적으로도 문화의 전승로였음을 감안해 볼 때, 이 설화는 그러한 문화를 따라 이동한 태양신화의 한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세초(비단)를 최남선은 ‘Mana’라는 말로 표현하였으며, 비단을 제사하여 광명을 회복하고, 이 비단을 귀비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편, 도기야는 『동국여지승람』에 욱기야(郁祈野)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경상도지리지』 근오지(斤烏支)의 ‘오지(烏支)’와도 음이 일치한다.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동일하여, 연오·세오가 일본에 건너가 구연의 땅 오키[迎日]의 이름을 자기의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도 보여진다. 이 점은 일본인 나카다[中田]도 출항과 기항지를 영일만과 오키 지부도(知夫島)로 비정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결국, 「연오랑세오녀설화」는 일찍이 우리 민족이 일본 땅을 개척하여 통치자가 되고 내왕한 문화적 사실을 원시적 태양신화의 동점설화에 붙여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좋은 예화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연오와 세오도 광명을 의인화한 명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연오랑세오녀전설의 한 연구」(이관일, 『국어국문학』55∼57, 1972)
「연오세오설화고」(소재영, 『국어국문학』36, 1967)
「알타이계 시조신화연오랑세오녀」(박시인, 『예술논문집』5, 1966)
「연오랑세오녀전설(延烏郎細烏女傳說)의 유래」(김창조, 『신흥』 창간호, 1929)
[네이버 지식백과] 연오랑세오녀설화 [延烏郎細烏女說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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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 세오녀
고려 초엽 박인량(朴寅亮)이 엮은 『수이전(殊異傳)』에 실렸던 것으로, 지금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수록되어 전한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는 신라의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던 부부인데, 157년(신라 아달라왕 4) 미역을 따러 나간 연오랑이 올라섰던 바위(물고기라고도 한다)가 움직여 일본의 한 섬에 닿아 임금이 되었다. 남편을 찾아 나선 세오녀도 또한 바위에 실려 일본에 닿아 연오랑을 만나고 왕비가 되었다. 그 때 신라에서는 돌연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 변괴에 놀란 왕이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이는 해와 달의 정(精)이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탓이라고 아뢰었다. 왕이 급히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는 없으나 세오녀가 짠 세초(細?:생사로 가늘게 짠 비단)를 가지고 돌아가 하늘에 제사지내라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다시 해와 달이 밝아졌다. 이로부터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지금의 영일만)이라 하였다. 이는 한국의 태양신(太陽神)에 관한 신화로서는 유일한 것이며, 이 태양신의 일본 이동과 관련하여 일본 태양신 신화와의 비교연구가 주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오랑 세오녀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반도 해양문화), 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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