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선조실록 / 선조 2년 1월 16일

benel_jt 2020. 2. 24. 22:49

선조실록 / 선조 2년 1월 16일

선조실록 3권, 선조 2년 1월 16일 경신 1번째기사 1569년 명 융경(隆慶) 3년  

석강에서 《근사록》을 강하고 기대승·구봉령이 구폐의 개혁을 청하다

상이 야대청(夜對廳)으로 석강(夕講)에 나아가 【소대(召對)의 예(例)대로 하였다. 】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다.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초기에는 청명하게 잘 다스려 보람 있는 업적을 이루어 보려는 뜻을 가졌다가도, 얼마쯤 지나면 처음에 부지런하던 마음이 나중에는 게을러져서 딴 길로 빠져들어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이가 적은데, 대부분 모든 사람이 그러합니다. 대개 인심이란 변화 무상하므로 잘못이 있기 쉽습니다. 성제 명왕(聖帝明王) 이하의 임금은 비록 기호(嗜好)와 함닉(陷溺)의 병폐가 없더라도 혹 오랜 세월이 지나 사공(事功)을 성취하지 못하면 심지(心志)가 나태해지고 의기(意氣)가 이완되어 끝내 잘하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병폐가 되는 곳이 매우 많으니, 혹은 사공에 힘을 쓰지만 경력이 부족하여 후환을 돌아보지 않고 경솔히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기도 하였고, 더러는 봉행하는 신료들이 심원한 계획으로 조용히 처리하지 못하고서 한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 편승해 어지러운 폐단을 낳아 성사하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을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마음이 차츰 해이해져서 지치(至治)를 이룩하지 못한 자가 옛날 제왕들 중에 상당히 많습니다.

송 효종(宋孝宗)을 보더라도 그는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매하였고 옛 강토를 회복하려는 뜻을 품었습니다. 즉위하자 곧바로 장준(張浚)을 초치(招致)하였는데, 장준은 버림받았던 끝이라 국사를 담당하기 어렸웠지만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애써 국사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출사(出師)하여 한번 패하게 되자 헐뜯고 이간하는 말이 끼어들었고, 효종도 마음이 한번 꺾이게 되자 용렬하고 범상한 사람들만 기용하여 겨우 한 세대를 유지하였을 뿐입니다. 송 신종(宋神宗)도 자품이 탁월하여 즉위한 초기에 뜻을 가다듬고 훌륭한 정치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부필(富弼)·한기(韓琦)는 충후하고 노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임금이 용병(用兵)하려는 것을 알고 20년간 입으로 전쟁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신종은 그들과 의사가 맞지 않았습니다. 송나라 옛법의 폐단이 이미 오래되어 이를 개혁하려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신종은 그 일을 담당할 만한 인재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왕안석(王安石)이 나와 담당하자 신종은 그를 신임하여 어지러이 법을 개혁해서 끝내 국가를 그르쳤으며, 그 뒤에 용병하다가 크게 패하자 신종은 한밤중에 일어나 통곡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흥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소인배들이 마구 진출하였고, 그 화가 만연되어 송나라 왕실의 화란의 터전을 만든 임금이 되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하늘처럼 지공 무사해야 합니다. 만일 한쪽으로 치우치게 신임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간사한 소인들이 기회를 노려 그 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범상한 상태로 되돌아가 잘 종결을 짓지 못하면 지치를 이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위하신 이후 성상의 뜻이 고명하시어 무슨 일이든지 잘하려고 하시고 꼭 성사시키려는 마음을 가지시니 조야(朝野) 신민들의 기대에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미열(迷劣)한 소신의 생각으로는, 시작에 뜻을 두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종결에 마음을 두는 것이 더욱 어렵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종말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하여 미리 꺼리어 스스로 포기하는 것도 크게 일을 할 기상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쉽게 여기지 말고 끝까지 확고히 정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은 성상께서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간의 말은 때로 신중하게 여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소견이란 보통 사람에 있어서도 다른 것이니, 성상의 심중에 소견이 있으실 경우 모든 일에 아랫사람의 소견이라 하여 억지로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론이 있는 곳에는 인심이 모두 같은 것이니, 물론 그와 같으면 성상께서도 스스로 반성하시되 ‘나의 생각에 미진한 점이 있었는가?’ 하시고, 자신의 주장을 굽혀 여론을 따르셔야 될 것입니다.

듣자니, 경연에서 올린 구폐책(救弊策)을 상께서 쾌히 시행하시려고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소견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천하(天下)의 사변이란 무궁한 것인데 만약 한 사람의 오견(誤見)으로 이미 왕명을 내린 뒤에는 나중에 개정한다 하더라도 미안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뢰기는 매우 황공하나 중묘(中廟)께서 초년에 태평 성대의 정치를 행하려고 하시자 당시의 현사(賢士)들이 모두 나와 악한 자를 배척하고 선한 자를 포양한 일이 많았는데, 이와 같이 처지할 적에 어찌 진선 진미하였으리오마는 중묘께서 좋다는 의사로 일일이 받아들여 따랐으므로, 조광조(趙光祖)는 스스로 중묘와 자신의 만남을 옛날 군신(君臣)의 만남에 비하고는 상하간에 서로 신임하여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군상의 마음이 한번 동요되자 헐뜯고 이간하는 말이 끼어들어 중묘께서도 그 신하를 보전하지 못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지난날의 밝은 거울입니다. 모든 일은 여러 각도로 충분히 생각하여 대신과 더불어 확실하게 의논하고 쉽게 여기지 말아 장구히 유지할 방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누적된 폐단이 매우 많으니 변혁하는 것 역시 아름다운 일이나,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매우 심한 폐단만 덜어 없애고 상의 학문이 차츰 높아지고 경력이 오래 쌓여 아래 신하들도 착수할 때 신중을 기하도록 경계한 연후에야 하는 일들이 견고하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말이 매우 퇴폐적이고 무력한 것 같지만,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누적된 폐단이 너무나 많아 지금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는데 갑자기 법령으로 그 폐단을 구제하려고 한다면 혹시 다른 병통이 발생하여 뒤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속담을 가지고 말씀드리자면, 오랜 조상 때부터 낡은 가옥을 개축하려면 반드시 훌륭한 장인(匠人)을 구해야 하고 여러 가지 자재(資材)도 준비해야 하며 또한 시기를 기다려 일을 해야지, 만일 하루아침에 갑자기 철거하고 나서 장인을 구하지 못하고 자재도 준비한 것이 없다면 뒷일을 수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요즘 인정을 살펴보건대, 그 근본을 다스리려고 생각하는 자는 적고 우선 목전에 당한 일만을 힘쓰는 자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이 쾌활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어른들은 어렵게 여기면서 시론(時論)에 구애되어 ‘해도 괜찮을 것이다.’라고만 하고 시종 일관 담당하여 생사를 걸고 해보려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폐단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만 알 뿐 또 다른 폐단이 그 속에서 발행하는 것을 모르며, 혹은 유익함만 도모하고 큰 해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서 너무도 참작함이 없으니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지난번 공상품(供上品)을 봉상(捧上)할 때 차지(次知)들이 폐단을 일으킨 일은 참으로 제거하고 싶은 바이나 저절로 차츰 변화하여 고쳐지게 하면 될 것입니다. 소신이 지금 정원(政院)에 있으면서 정원의 일을 말하는 것은 미안한 듯하지만, 관리들이 지나치게 작폐하는 폐단이 있을 경우 정원으로 하여금 규찰(糾察)하게 한 일을 원내(院內)에서도 범연하게 보았는데, 계하(啓下)하셨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다시 아뢰는 것일 뿐입니다. 법을 세울 때는 무엇보다도 상세히 살피고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정원이 원내의 하인(下人)들을 단속하는 것은 매우 용이한 일인데도 그대로 폐단이 쌓여 졸지에 변경할 수 없는데 외간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정원은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중요한 곳으로서 그 책임이 막중한데 외간의 범람한 일까지 정원에서 맡아 검거하게 한다면 일의 대소가 달라지는 것이니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공상품을 봉상할 때 뇌물을 받는 등의 일은 담당 하인들이 트집을 잡아 작폐하는 것이니, 매우 그르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폐단의 근원이 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공산품은 각사의 관원의 직접 진배(進排)해야 하는데 온갖 일이 해이해져서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 공납하게 합니다. 담당 관원이 직접 와서 진상하지 않는 까닭을 문책하면 하인들은 반드시 뇌물로써 입을 막아버리곤 하니, 각사의 관원들 역시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발견되는 대로 엄히 다스려서 자숙하게 한다면 폐단의 근원이 자연 없어질 것입니다. 【13일 조강에서 사간(司諫) 윤강원(尹剛元)이 아뢰기를 ‘내정(內庭)의 공상품을 점퇴(點退)시켜 뇌물을 받는 것을 정원으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소서.’ 하였기 때문에 기대승이 언급한 것이다. 】 소신이 그 때 몸에 병이 났거나 식가(式暇)001) 로 출사(出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정원으로 하여금 규찰 검거하게 하는 공사(公事)는 사체에 매우 방해가 있다.’고 하니, 동료들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근밀(近密)한 곳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성명(成命)을 봉행하지 않으려니 미안스럽고 【이 때 상이 윤강원이 아뢴 대로 따랐기 때문에 기대승이 이처럼 말하였다. 】 봉행하자니 불편한지라 이를 신들이 고민하는 것입니다.

인심이 함닉(陷溺)된 지 이미 오래여서 형륙(刑戮)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호령만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저마다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 ‘빨리 하고자 하지 말며 소리(小利)를 구하지 말라. 빨리 하고자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소리를 구하면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지당한 논설입니다. 전하께서 종묘 사직의 억만 년 대업을 위해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시니 예사로운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심사 숙고하여 처리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일시적인 기분에 좋다고 여겨 하였다가 나중에 행할 수 없게 되면 심지가 나태해지고 의기가 소침해지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며, 혹시라도 참소하는 말이 이간하게 되면 끝내는 필시 현자(賢者)의 말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할 터이니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하고, 구봉령(具鳳齡)이 나아가 아뢰기를,

"기대승의 말은 송 효종(宋孝宗)과 신종(神宗)이 시작은 있었으나 끝이 없었고 군자를 등용하면서 소인까지 섞어 등용하였으며 선한 일을 하면서 악한 데로 흘렀던 것을 상세히 분별하여 말한 것이고, 전하께서 입지(立志)가 확고하지 못하고 처음에는 총명하다가 나중에 암매하게 될 조짐이 있다고 하여 한 말은 아닙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진계(進戒)하는 것은 반드시 치세(治世)를 본받고 난세(亂世)를 징계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쾌히 시행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나 일에는 경중(輕重)과 대소(大小)와 완급(緩急)과 선후(先後)가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 잘못 일마다 어렵게 여겨 심사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의 뜻은 번쇄하고도 오래된 폐단을 변경하여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도리를 모색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선치(善治)를 원하는 군주로서 전진이 빠른 자는 후퇴도 빠른 법입니다. 장원한 계획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빨리 하려는 근심이 있게 됩니다만, 빨리 행할 만한 일이면 빨리 시행해야 하고 중난한 일이면 대신들에게 물어서 해야 합니다. 전하의 정치가 이제까지 별로 큰 과오가 없었을 뿐더러 시초가 청명한 점은 월등하다 하겠습니다. 요즘 대간(臺諫)의 논계(論啓)는 온 나라의 공론인데도 계사에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으면 드러내 말하라고 하시고 간혹 준엄한 언사로 하답(下答)하십니다. 만약 조정이 혼란하여 간신(奸臣)이 권병(權柄)을 차지했을 때라면 기용된 사람들 중에 충직한 군자와 간사한 소인이 섞여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대간이 사사로운 혐의를 품고 혹시 현량(賢良)한 사람을 무함하면 성상께서 환히 살피시고 어렵게 여기시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옛말에 ‘치세에도 소인이 없지 않으나 소인이 되기가 어렵고, 난세라고 군자가 없지 않으나 군자 노릇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근일 내외의 인심이 지치(至治)를 간절히 희망하기 때문에 대간이 아뢰는 것은 모두가 온 나라의 공론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일마다 어렵게 여기고 쾌히 따르지 않으시니, 성치(聖治)에 방해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규간(規諫)하는 마음을 막기도 합니다. 신하와 임금 사이는 의리상으로는 군신이지만 정리는 부자와 같은 것인데도 오히려 할 말을 다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조금이라도 어렵게 여기시면 군신(群臣)들은 의기(意氣)가 저상(沮喪)되어 견책(譴責)을 받을까 우려하게 될 것이며, 자만하시는 안색이 오는 사람을 천 리 밖에서 막을 것이니 심히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상께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가 점차 처음만 못한데 요즘에는 더욱 심합니다.

소신이 전에 이조 낭관(吏曹郞官)으로 있으면서 보니, 온 나라에 쓸 만한 사람이 매우 적었습니다. 당상(堂上)을 의망(擬望)할 때 신이 곁에서 살펴보았는데 하자(瑕疵)가 없는 사람을 어찌 다 얻어 낼 수 있겠습니까. 군현(郡縣)이 하나만이 아니고 백집사(百執事)가 매우 많습니다. 이리하여 혹은 불가한 줄 알면서 그대로 충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어떠한 인물인지도 모르면서 주의(注擬)하기도 하니, 공론을 맡은 사람이 그 불가한 것을 알게 되면 당연히 핵론하여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왕(聖王)은 변공(邊功)에 대해서는 상을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듣건대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도 전임(田霖)에게 해랑도(海浪島)의 토벌을 명하여 모두 토벌하고 돌아오자 개성부(開城府)에 명하여 일등악(一等樂)을 하사하여 위로하게 하였을 뿐, 상으로 하사한 물품은 안구마(鞍具馬) 1필(匹)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다 위에 떠돌던 하찮은 무리가 스스로 죽음을 자청해 오자 한번의 추격으로 포획한 것은 대단한 공이 아닌데도 갑자기 중한 상으로 논하니, 뒷날 강적이 경내를 침범하여 왔을 때 이를 쳐부수어 방어한 공을 세운 사람이 있다면 또 어떠한 상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고식적인 정치를 해서는 아니되며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삼가 중외(中外)의 인심을 살펴보니 실망함이 없지 않습니다." 【이 때 전라 수사(全羅水使) 임진(林晉)이 흑산도(黑山島)의 수적(水賊)을 추격하여 포획했는데, 상이 가선(嘉善)을 가자(加資)하라고 명했다. 대간이 개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

하고, 기대승이 또 아뢰기를,

"구봉령이 아뢴 말이 지당합니다. 신의 뜻도 온갖 일에 모두 어렵게 여김이 있기를 바란 것은 아닙니다. 대간이 아뢴 것에 대해서 어렵게 여기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을 신도 아뢴 것입니다. 변경하는 일에는 삼가시고 간언을 따르는 데는 쾌하게 하신다면 강유(剛柔)가 편중(偏重)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소신의 아뢴 것과 경연관이 아뢴 말은 서로 도와 지치를 이룩하려는 것으로 다 성덕(聖德)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 혹 의사가 미진하거나 말에 미진한 점이 있으면 상께서 중도(中道)를 택하여 쓰소서. 요즘 임진(林晉)의 일에 대해서 양사(兩司)가 논집한 지 보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망설이시므로 물정(物情)이 미안하게 여깁니다. 대간은 바로 공론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인들 어찌 상께서 꼭 따르신 뒤에야 말려고 하겠습니까. 한두 번 아뢰다가 정지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물정이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기기 때문에 대간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시원스럽게 따를 만한 것입니다. 만약에 끝까지 거절하신다면 언로가 막히게 되고 마지못해서 따르신다면 성덕이 미진하게 될 것이니, 이런 것이 유념할 점입니다. 혹 중죄로써 논하는데 곧바로 쾌히 따르시면 쾌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먼저 살펴보시고 뒤에 따르시는 것도 역시 무방합니다. 오래 되었는데도 따르지 않으신다면 미안한 일입니다. 임진이 수적을 포획한 것이야 무슨 칭할 만한 공로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홍남(李洪男)의 일도 물정이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이 때 대간이 이홍남의 죄를 함께 논하였다. 】 유념하시어 쾌히 따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