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山

상주 화북 장각동에서 속리산 천왕봉으로 20191012 토

benel_jt 2019. 10. 12. 22:16

상주 화북 장각동에서 속리산 천왕봉으로 20191012 토 산하


코스 : 장각폭포 - 장각동 - 상오리칠층석탑 - 속리산천왕봉 - 헬기장 - 장각계곡 - 장각폭포


(0:00~)10:58/0.00km 장각폭포
(0:16~23)11:14~21/1.7km 상오리칠층석탑
(1:06~)12:04/3.98km 갈림길
(1:24~)12:12/4.29km 협곡석벽
(1:34~)12:32/4.86km 마지막 폭포 돌아서 우회
(3:05~)14:03/6.18km 등산로능선
(3:08~)14:06/6.34km 정상
(4:38~)15:36~58/9.49km 탁족(22')
(~5:28)16:28/12.4km 폭포주차장



A팀이 화북분소에서 문장대를 거쳐 속리 천왕봉으로 갔다가 되돌아 헬기장에서 하산하는 길을 가는 동안 나는 장각폭포를 먼저 보고 상오리칠층석탑을 거쳐 정상으로 직등하는 길을 탐사했다.

처음에 생각한 것은 형제봉에서 오는 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외로 정상으로 바로 직등하는 결과가 되었다.

길도 없고, 가파르고 위험한 모험을 한 셈이다.



속리산 [俗離山]


높이 : 1058m
위치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걸쳐 있는 속리산은 우리나라 대찰 가운데 하나인 법주사를 품고 있다.


정상인 천황봉(1,058m), 비로봉(1,032m), 문장대(1,033m), 관음봉(982m), 입석대 등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능선이 장쾌하다. 봉우리가 아홉 개 있는 산이라고 해서 신라시대 이전에는 구봉산이라고도 불렀다.

속리산은 산세가 수려하여 한국 8경 중의 하나로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봄에는 산벚꽃,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가을엔 만상홍엽의 단풍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지고, 겨울의 설경은 마치 묵향기 그윽한 한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등 4계절 경관이 모두 수려하다.


속리산은 법주사(사적 명승지4호), 문장대, 정2품 소나무(천연기념물 103호)로 대표된다. 법주사에는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연지의 국보와 사천왕석등, 대웅전, 원통보전, 마애여래의상, 신법천문도병풍의 보물 등 문화재가 많다.


문장대는 해발 1,033m 높이로 속리산의 한 봉우리이며, 문장대에 오르면 속리산의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문장대는 바위가 하늘 높이 치솟아 흰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일명 운장대라고도 한다. 문장대 안내판에는 문장대를 세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정2품 소나무는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수령 600여년의 소나무로, 조선 세조 때, 임금님으로부터 정이품이란 벼슬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마치 우산을 펼친 듯한 우아한 자태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


세조대왕(1464년)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대왕이 탄 연이 이 소나무에 걸릴까 염려해 '연 걸린다'라고 소리치자 소나무가지가 번쩍 들려 무사히 통과했다는 사연으로 '연걸이 나무'라고도 한다. 이러한 연유로 대왕은 이 나무에 정2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속리산은 산행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산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찾아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곳 이어서인지 관광객들이 수시로 찾아든다. 속리산 단풍은 설악이나 내장산과 같이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다.


1,033m높이의 문장대에 오르면 속리산의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신선대 휴게소에서 주변 풍광으로 청법대 바위의 웅잠함에 감탄하게 된다.


신랑 헌강왕 때 고운 최치원이 속리산에 와서 남긴 시가 유명하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은폭동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양양하게 흐르는 것이 물인데/어찌하여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세상사람들이 때묻은 발 씻을까 두려워/자취 감추고 소리만 내네"


인기명산 [10위]

법주사, 문장대, 정2품 소나무 대표되는 속리산은 법주사 입구의 울창한 오리숲, 기암괴석이 즐비한 수려한 경관에 단풍 또한 장관이다. 단풍이 절정인 10월에 많이 찾으며 봄에도 인기 있다. 법주사에는 여러 문화재가 많고. 복천암까지의 나들이 코스도 있어 사계절 인기 있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예로부터 산세가 수려하여 제2금강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고 망개나무, 미선나무 등 1,000여 종이 넘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국립공원으로 지정(1970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법주사(法住寺), 문장대,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正二品松) 및 천연기념물 제207호인 망개나무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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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GPS트랙 참고 : Tr상주속리산장각폭포201910121058.gpx, 상주속리천왕봉장각폭포2019-10-12_10-59-23.gpx








장각폭포의 오후




10:32 A팀이 화북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 하차하고 B팀 3명은 10:45에 장각폭포 하차









금란정과 장각폭포













상오리칠층석탑


상오리 칠층석탑

 
속리산으로 가다 화북면 상오리에 이르면 그다지 넓지 않은 길 양쪽으로, 키는 크지 않으면서도 그늘이 넓은 소나무숲이 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상오초등학교를 끼고 꺾어져 장각동으로 가는 길가 한쪽에 정자가 한 채 있다. 이름이 ‘금란정’인 이 정자는 매우 아담하고 조촐하다. 금란정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바로 옆에 시원하게 물살이 떨어지는 장각폭포가 있어 여름이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이 장각폭포는 속리산 천황봉에서 발원하여 그 긴 여정을 타고 마침내 낙동강에 합류하는 물줄기의 머리부분이다. 6m 남짓의 폭포로 장대하지는 않지만 ‘처음’이라는 신선함이 있다.

폭포에서 물맞이를 시원하게 하고서 다시 길을 따라 동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장각동 초입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비교적 높은 둔덕이 있다. 그 둔덕 밭 위에 키가 큰 칠층석탑 한 기가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터에 자리잡았던 아늑한 옛절의 모습은 간데없고 풀포기가 틈을 비집고 자라나는 돌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견훤산성이 있는 시어동 계곡이 문장대로 오르는 길이라면, 이 상오리 칠층석탑이 있는 곳은 천황봉으로 오르는 장각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1층 몸돌이 상층기단보다 훨씬 높아 다소 불안한 듯해도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신라 하대 또는 고려탑이라 보기도 한다.


얕은 토단 위에 2층 기단을 쌓고 다시 7층을 올렸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상층기단 위에 1층 몸돌이 불쑥 솟고, 지붕돌도 그 자락을 넓게 펼치지 않아서인지 키가 쑥쑥 커서 다 자란 남학생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1층 지붕돌에서부터 줄어드는 비율이 일정해서 좀 불안한 듯하기는 해도 균형을 잃지는 않고 있다. 기단부의 불안함을 미루고 생각해보면 전체적인 인상은 충주의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과 닮아보여 신라 하대에 세워졌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고려시대에 파격적이고 지방적인 탑이 많이 세워졌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1층 몸돌 동쪽면에 문고리를 잠근 모양이 유일한 장식으로 단정한 맛을 살리고 있는 상오리 칠층석탑은 보물 제683호이다. 전체 높이 9.21m의 이 탑이 있는 자리는 비교적 옹색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었다고 하는데, 무너져 방치되었던 것을 1977년에 다시 쌓아올렸다. 탑 주변에는 주춧돌과 기왓조각, 석등 파편들이 있고 탑 뒤쪽 고추밭에서도 주춧돌이 발견되어 제법 규모가 큰 절이 있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25번 국도와 49번 지방도로가 갈라지는 화서면 상곡리 삼거리에서 49번 지방도로를 따라 상오리 칠층석탑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마을 동관리에는 길가에 돌무지 서낭당이 있다. 돌을 키높이로 단정하게 쌓은 모습인데, 상주에서는 이런 서낭당을 모신 마을을 꽤 많이 만날 수 있다. 돌무지 한가운데에 입석을 세워 입석신앙의 면모를 보이는 것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오리 칠층석탑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김혜형, 정용기)






















해발 1058m, 정상석이 양면으로 표기 되어 있다.

보통 한자 표기 방향에서 인증을 하는데 이 시각에는 뒷면의 한글이 밝게 보인다. 카메라의 설 자리가 마땅치는 않은 편이다.




















하산길의 전방에 보아는 도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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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길에 화령장 전적비를 보고 왔다.

여기 도착하기 전의 전적기념관이 있었지만 시간관계로 패스...









잘 불려 지지도 않는 무공수훈자 명단을 꼼꼼히 읽어 기리며...






 상주 화령장전투 [Battle of Sangju Hwaryeongjang, 尚州化寧場戰鬪]

한국전쟁 때인 1950년 7월 경상북도 상주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17일부터 7월 24일까지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화령장(化寧場) 일대에서 국군 제17연대와 제1사단이 북한군 제15사단과 벌인 전투이다. 상주 방면으로 진격해온 북한군에 큰 타격을 입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방어체계를 정비하는 데 기여하였다. 현재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上縣里)에 ‘화령장지구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배경과 원인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마저 점령하자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8군에 소속된 제24보병사단을 우선 한국으로 파병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평택-충주-울진’을 잇는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는데, ‘안성-평택’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미군은 금강 남쪽 지역으로 후퇴했다. 국군도 소백산맥의 ‘이화령-조령-죽령’ 지역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육군본부는 ‘문경-함창-상주’로 이어지는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7월 12일 함창(咸昌)에서 제6사단과 제8사단 병력을 중심으로 제2군단을 창설했다. 제1군단에 소속되어 청주에서 북한군과 싸우고 있던 국군 제17연대도 제2군단으로 소속이 바뀌었으며, 제6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기 위해 함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발발과 전개과정


상주 북부에 위치한 화령장은 보은과 괴산에서 상주 방면으로 향하는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홍천과 여주 방면으로 남하해 7월 10일 음성을 점령한 북한군 제15사단은 이 지역을 통해 상주를 향해 진격해왔다.

부상을 당해 후송된 백인엽(白仁燁) 대령을 대신해 부대를 이끌고 함창으로 향하던 국군 제17연대의 부연대장 김희준(金熙濬) 중령은 7월 17일 북한군이 괴산에서 상주로 향하는 도로가 지나는 갈령(葛嶺)을 넘어 화령 방면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곧 선두로 화령장 지역에 도착해 있던 1개 대대 병력으로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갈령 아래 하송리와 상곡리 일대에 주둔지를 편성하고 있던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 병력에 기습공격을 가해 250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국군 제17연대는 전투과정에서 북한군 후속부대가 곧 이동해온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그래서 김희준 중령은 뒤이어 도착한 2개 대대 병력을 봉황산(741m) 너머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東觀里)의 갈령과 장자동(長者洞)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매복시켰다. 그리고 7월 20일 갈령을 넘어오는 북한군 제45연대 병력에 공격을 가해 350여 명을 사살하고 2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군 제15사단은 제48연대와 제45연대 병력이 잇달아 큰 피해를 입자 갈령을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자 국군 제17연대는 음성에서 상주로 철수해 있던 제1사단과 7월 23일 오후에 임무를 교대하고 상주로 물러났다. 국군 제1사단은 7월 23일부터 7월 25일까지 갈령과 장자동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며 북한군의 진출을 막아냈다.


결과와 영향


상주 화령장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 2개 연대 병력에 큰 피해를 입히며 북한군의 진격을 1주일 이상 가로막았다. 그래서 소백산맥의 산지로 이동해 국군 제2군단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을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국군과 유엔군이 방어 체계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국군 제17연대는 이 전투에서 600여명 이상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1천여 점의 북한군 병기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공으로 제17연대는 장병 모두가 1계급 특진의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7월 20일 미 제24사단이 지키던 대전이 북한에 점령되면서 전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미군은 7월 30일까지 상주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낙동강 방어선으로 전선을 축소하려는 미 제8군 사령관인 워커(Walton Harris Walker) 중장의 작전계획에 따라 7월 31일 상주에서 철수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주 화령장전투 [Battle of Sangju Hwaryeongjang, 尚州化寧場戰鬪]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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