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도드람산-설봉산 산행 20190518 토 산하
코스 : 도드람산주차장-효자멧돼지상-1,2,3봉-도드람산 정상-돼지굴(바위)-삼각점-석이약수-굴다리-이천장암리태평흥국명마애반가보살상-치킨대학-화두재-백운봉-도원정(부학루)-부학봉-영월암갈림길-영월암,마애여래입상,은행나무-영월암갈림길-설봉산정상,희망봉(394m)-서희봉-연자봉-설봉산성,봉화대-설봉서원-설봉호수-주차장
11:37 도드람산 식당앞 하차
11:43 효자맷돼지상 들머리
12:04 도드람산 제1봉
12:08 도드람산 제2봉
12:18 도드람산 제3봉
12:27 도드람산 정상(349m), 효자봉
12:38 효자와 돼지 이야기가 있는 도드람산 유래 읽고 철계단 오름
12:45 돼지굴 상단에서 조망
12:49 내려와서 삼각점봉(309.1m)
12:54 다시 도드람산 유래 보며 하산
13:03 석이약수(눈으로 보아도 음용불가)
13:14 굴다리 통과
13:20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
13:37 치킨대학캠프 입구 버스대기
13:46 차량으로 1.2km 이동 후 치킨대학
13:49 등산로 입구
13:51 주차장 뒤 등산로 입구
13:56 화두재
13:59 [설봉산 정상0.97, 화두재0.07,도드람산2.7]
14:04 백운봉
14:11 도원정(부학루)
14:17 부학봉
14:19 [화두재0.71, 설봉산정상0.22, 영월암0.30]
14:24 [설봉산정상0.44, 설봉공원입구1.34, 영월암0.10]
14:25 범종각, 대웅전, 삼신각, 마애여래입상, 은행나무
14:47 [화두재0.71, 설봉산정상0.22, 영월암0.30]
14:53 설봉산정상,희망봉(394m) [화두재0.93, 호암약수1.73, 설봉공원입구2.06]
15:15 서희봉
15:20 연자봉
15:23 [설봉산정상0.49, 설봉공원입구1.57]
15:28 성터, 활공장?
15:31 남장대지
15:32 사직단
15:33 성화봉, 봉화대
15:36 설봉산성 안내판 [설봉산정상1.03, 설봉공원입구1.03, 사음동0.8]
15:45 [설봉산정상1.32, 호암약수0.4, 설봉공원입구0.73]
15:51 [설봉산정상1.71, 호암약수0.12, 구암약수1.3, 설봉공원입구0.35]
15:58~16:06 설봉서원
16:06 [영월암0.7, 설봉공원입구 0.5, 구암약수 1.03, 호암약수0.4]
16:10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월전기념관
16:16 장위공 서희선생상
16:19 암벽훈련장
16:24 설봉호
16:27 주차장에서 종료
이미 후식이 후반에 접어들 무렵이다.
내가 설봉산을 절반만 도는 동안 다른이들은 설봉산을 일주하고 온 셈이다.
종주에 의미를 두는 것과 산의 속살을 보고 오는 것의 차이일 것이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시간의 제한에 어쩔 수 없는 일...
오랫 동안 고대하던 산을 답사한 날이다.
도드람산 설봉산 GPS 파일 첨부 : Tr이천도드람산설봉산201905181140.gpx,
이천도드람산설봉산2019-05-18_11-38-23.gpx
도드람산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에 있는 도드람산에 관한 설화.
도드람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천부편」 산천 조에 ‘저명산(猪鳴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헌에 기록된 명칭과 구전되는 설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도드람산설화>는 매우 오래 전부터 구전되었을 것이다.
줄거리
<도드람산설화>는 조산설화와 효행설화 두 유형이 전한다. 옛날에 전국 명산의 신령들이 모여 한양을 만들었다. 이때 마고할미는 삼각산 봉우리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는데, 계룡산에서 봉우리 하나를 등에 지고 이천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구경꾼 가운데 한 사람이 “산봉우리를 어디로 가져가는 길인가?” 하고 물었다. 마고할미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한양에는 이미 삼각산이 다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냥 우리 고을에 두고 가는 것이 어떻겠소?” 하였다. 마고할미는 하는 수 없이 이천까지 지고 온 산봉우리를 그 자리에 놓아둔 채 돌아갔다. 그 봉우리가 지금의 도드람산이다.
효행설화인 <효자를 구한 산돼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 산 근처에 효자가 살았다. 어머니가 병으로 몸져눕자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청하러 왔다가 “도드람산에서 자라는 석이버섯을 드리면 나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효자는 한 가닥의 밧줄에 몸을 묶고 절벽을 내려가 버섯을 뜯고 있을 때 어디선가 산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효자는 절벽 위로 올라와 주변을 살폈는데, 산돼지는 간 곳이 없고 밧줄이 바위 모서리에 닳아서 거의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이로 인해 효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변이
<도도람산설화>는 주변의 산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뚝 솟아 마치 금강산이나 설악산 또는 계룡산의 봉우리 하나를 옮겨다 놓은 듯한 모습에서 생겨난 이야기일 것이다. ‘도드라지다’라는 말의 뜻이 ‘겉으로 또렷하게 드러나다’라는 사실을 전제하면 도드람산의 명칭도 처음에는 단순히 외형을 묘사한 명칭일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발음이 유사한 ‘돝(돼지)+울음’으로 구전되면서 지금의 도드람산 효행전설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효행전설로 구전되는 과정에서 다시 한자 표기인 ‘저명산(猪鳴山)’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분석
<도드람산설화>의 한 유형인 조산설화는 한양 도읍지를 형성하던 당시의 형국과 관련된다. 전국 명산의 신령들이 모여 한양을 만드는데 마고할미에겐 삼각산의 한 봉우리를 채우도록 하였다. 마고할미는 공주 계룡산의 한 봉우리를 옮기다가 도중에 이천에서 쉬고 있었는데, 이미 삼각산의 봉우리를 다 채웠다는 소식을 듣고 옮기던 봉우리를 이천에 버려두었다는 이야기이다. 효행설화는 효자의 지극한 효심을 가상하게 여긴 도드람산의 신령님이 산돼지를 보내 효자의 목숨을 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돝(돼지)울음산’으로 불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도드람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의의
<도드람산설화>는 산의 독특한 외형으로 인해 명칭이 정해지고, 그 독특한 명칭으로 인해 설화가 파생된 경우이다. 조산설화와 효행설화가 함께 구전되면서도 독특한 외형과 명칭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기적인 관련을 갖는다. 효행설화의 화소인 돼지굴도 조산설화의 화소와 공유된다.
집필 : 홍순석(洪順錫)/강남대학교
참고문헌 : 이천의 옛이야기(홍순석·이인수, 이천문화원, 2008년)
출처 : 新增東國輿地勝覽
이천시지(이천시, 2009)
도드람산 정상, 역시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떨어져서 보아야 산이 보인다.
암릉을 오르기도 하며 찾은 정상이다. 전설을 따라..
삼각점은 돼지굴에서 내려오면 50m 정도 앞의 나즈막한 봉에 ..
석이약수... 그 이름을 믿어서는 안될 정도다.
지하통로를 지나 좌로나 우로 돌아 마애불로 ...
태평흥국명마애보살상..
▣ 이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利川映月庵磨崖如來立像]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영월암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높이 9.6m. 보물 제822호. 자연암석을 다듬고 바위면 전체를 꽉 채워 조각했으며, 불상이라기보다는 영월암의 창건조사 혹은 이 사찰과 인연이 깊은 고승을 기리기 위하여 조각된 상으로 추정된다.
건립시기·연도 : 고려 초기
소재지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2709번길 276(관고동)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822호
문화재 지정일 : 1985년 1월 08일
보물 제822호. 높이 9.6m. 자연 암석을 다듬고 바위면 전체를 꽉 채워 조각하였는데, 머리와 양손만이 얕게 부조(浮彫)되어 있고 옷 주름 등은 모두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었다.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는 크고 뚜렷하게 조각되었는데, 지그시 감은 듯한 눈과 넓적한 코, 두툼한 입술 등의 모습은 다소 투박하지만 온화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머리는 육계(肉髻)가 없는 민머리이며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시가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게 하였고, 왼손은 아래를 향하여 손바닥이 안으로 향한 모습이다.
왼쪽 어깨에 걸쳐진 우견편단(右肩偏袒) 형식의 옷은 몸 전체에 유연한 사선을 그으며 흐르고, 왼팔을 돌아 내려간 가사 끝단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 마애상은 지정 당시의 명칭이 마애여래입상으로 되어 있으나 조사 결과, 머리가 승려머리인 점이나 복식(服飾)이 가사 형식인 점 등으로 보아 나한상이나 조사상(祖師像)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마애상은 불상이라기보다는 영월암의 창건조사(創建祖師) 혹은 이 사찰과 인연이 깊은 고승을 기리기 위하여 조각된 상으로 생각된다.
영월암은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하여 북악사(北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현재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유례가 드문 마애조사상(磨崖祖師像)으로서, 조성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한바퀴 돌아 보았지만 .태평흥국.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태평흥국육년신사이월십삼일
太平興國六年辛巳二月十三日
고려초 경종 5년(980)
치킨대학으로 이동하기 위해 차를 기다린 곳,, 여기서 치킨대학은 1.2k. 차라리 도보가 빠르겠다.
처음에 설봉공원으로 이동하겠다고 안내를 했지만 이게 더 고도를 높이고, 거리도 단축시킨다.
빠른 사람들이야 벌써 도보로 이동했다.
대학 주차장에서 등로 입구 안내판을 따라...
화두재 365계단
백운봉, 청운봉..이어지는 봉마다 정상석이다.
도원정, 일명 부학루
부학봉, 영월사 갈림길이 있다.
영월암 은행나무
▣ 이천 영월암 은행나무[利川映月庵銀杏--]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번지 영월암에 있는 은행나무. 이천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지정종목 : 향토문화재
지정번호 : 경기-이천-1
지정일 : 1982년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2709번길 388(관고동 438) 영월암
종류/분류 : 보호수
1982년 10월 경기-이천-1로 지정된 보호수이다. 설봉산(雪峯山) 중턱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 영월암(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 입구에 서 있는 은행나무로 수령이 640년에 달해 영월암의 유서 깊은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수량은 1그루이며 높이는 26m이고 흉고 둘레는 5m이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대사가 현재 나무가 서 있는 자리에 지팡이를 꽂았는데 이것이 자라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이천 설봉산성[利川 雪峯山城] ▣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沙音洞)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423호
지정일 : 2000년 09월 16일
크기 : 면적 137,098㎡
2000년 9월 16일 사적 제423호로 지정되었다. 부학산성(浮鶴山城)·무학산성(舞鶴山城)·관고리성(官庫里城)이라고도 한다. 계곡을 감싸안고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이천 설봉산(394.4m)의 7∼8부 능선, 속칭 칼바위를 중심으로 한 3만여 평의 고원지대에 있어 이천시는 물론 멀리 장호원과 양평·안성 등의 주변 지역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본성(길이:1,078m)과 관측용 부성 2개(길이:532m, 362m)로 이루어지며,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았으나 돌로 쌓은 석축도 군데군데 있다.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내렸거나 매몰된 상태이고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은 6곳으로 높이 2∼3m 안팎이다.
이천지방은 백제시대와 고구려 점령기를 거쳐 삼국시대 후반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삼국통일 때 요충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신라의 지방군사조직 십정(十停) 중 하나인 남천정(南川停)이 설치될 만큼 정치 군사상의 요지였다. 또한 토기 제작이 활발하여 이 남천정을 중심으로 백제·고구려·신라의 토기문화 흔적들이 뒤섞여 나타난다.
발굴조사 결과 산성의 서문이 있던 자리의 원토층에서 백제의 토기들이 다량 출토되었고 계단석과 옹벽 뒤편에 쌓인 점토층에서는 신라의 토기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유물로 보아 성을 처음 쌓은 것은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은 시기의 백제이고 뒤에 신라가 보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000년 9월까지 본성의 성문터 3곳, 건물터 6곳, 장대석 1기, 치성 4곳, 우물터 1곳, 배수지 2곳과 부성의 건물터 9곳, 치성 3곳, 성문터 1곳, 추정저수지 2곳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평기와·토기·자기·석제류·철제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밖에 건물터임을 증명하는 인공 주춧돌(9×6.3m)을 비롯하여 동쪽 능선 칼바위 주변의 장대지(將臺地)와 제사터, 군기를 꽂았던 바위, 돌싸움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3곳 남아 있다.
▣ 설봉서원[雪峯書院] ▣
요약경기도 이천시 관고동에 있는 서원이다.
설봉공원 내에 있다. 선현을 모시고 유생을 교육하기 위하여 1564년(명종 19) 이천부사 정현이 창건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이천시와 문중의 노력으로 2007년 4월 복원하였다. 부지면적 6,612㎡ 건물면적 300㎡ 규모이며 주요 시설로는 대성전, 동·서재, 내·외삼문 등 건물 9개동이 자리잡고 있다. 배향 인물은 서희, 이관의, 김안국, 최숙정이다.
새로운 교육문화를 창출하고 인성을 함양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학과 전통예절을 배우는 학생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일반인을 위하여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사서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등 오경을 배우는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 서희[徐熙]는 아래에 별도 참조 ◀
▶ 최숙정[崔淑精] ◀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최숙정의 시문집으로, 1813년(순조 13) 후손인 인점, 만점 등이 2권 1책으로 편집, 간행하였고, 1918년 후손 익남, 형근 등이 다시 부록을 추가하여 간행한 것이다.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칭별칭 : 자 국화(國華), 호 소요재(逍遙齋), 사숙재(私淑齋)
⊙출생 - 사망 : 1433년(세종 15) ~ 1480년(성종 11)
⊙본관 : 양천(陽川) / ⊙저서(작품) : 소요재집 / ⊙대표관직(경력) : 홍문관부제학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逍遙齋)·사숙재(私淑齋). 최우보(崔雨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승흡(崔承洽)이고, 아버지는 오위사정(五衛司正) 최중생(崔仲生)이며, 어머니는 안선복(安善福)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61년(세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2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뒤 사관(史官)으로 발탁되었다. 1464년 문풍진흥을 위한 본관(本官)으로서 예문관직을 겸비하고 유학을 습업(習業)하게 한 겸예문직의 운영과 함께 겸예문직에 제수되고 사학문(史學門)에 배속되었다.
1466년 문과중시에 3등, 계속해서 발영시(拔英試)에 2등으로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의 혜택을 입었다.
1470년(성종 1) 형조좌랑·경연시독관에 개수(改授)되면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고, 실록편수가 끝난 뒤 1계(階)가 가자(加資)되었다.
1472년 사헌부지평, 이후 예문관교리·경연시독관·경연시강관 등을 역임하고, 1476년 12월에 찬진(撰進)된 『삼국사절요』의 편찬에 예문관부응교로서 참여하였다. 1477년 예문관직제학·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이듬해 찬진된 『동문선』의 편집에 참여하고, 같은 해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여주목사(驪州牧使)로 파견되었다.
1479년 “두량(斗量)을 부정하게 사용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그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으로 복직되었다. 일세의 명현이었다는 평판과 높은 시격(詩格)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저서로는 1813년(순조 13)에 간행된 『소요재집』 2권이 있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소요재집(逍遙齋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잡록(海東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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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의[李寬義] ◀
⊙이칭별칭 : 자 의지(義之), 호 율정(栗亭)
⊙출생 - 사망 : 미상 ~ 미상
⊙성격 : 성리학자
⊙출신지 : 미상
⊙본관 : 광주(廣州)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의지(義之), 호는 율정(栗亭).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기상·역학 등의 일반과학 분야까지 전심하여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진사에 합격하고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당시 진사의 위차가 생원의 아래에 있어 나이 많은 진사도 젊은 생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예조에 고쳐줄 것을 상계(上啓)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1483년(성종 14) 성종이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방정한 인물을 널리 구할 때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을 받아 경연(經筵)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론하였다.
서거정(徐居正)·허종(許琮) 등의 석학은 물론, 성종도 그의 고매한 품위와 박식에 탄복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이 때 성종이 높이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이를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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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안국[金安國] ◀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김안국의 문집. 1574년(선조 7) 문인 허충길이 편집, 간행하였고, 1687년(숙종 13) 김구가 용강서원에서 중간하였다.
⊙이칭별칭 : 자 국경(國卿), 호 모재(慕齋), 시호 문경(文敬)
⊙출생 - 사망 : 1478년 ~ 1543년
⊙본관 : 의성(義城)
⊙관련사건 :기묘사화
⊙저서(작품) : 모재집, 동몽선습, 모재가훈
⊙대표관직(경력) : 수교리,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조선전기 수교리,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김연(金璉)의 아들이며, 김정국(金正國)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慕齋家訓)』·『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性理大全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모재집(慕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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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徐熙]
우리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외교관
출생 - 사망 942 ~ 998
993년(성종 12), 거란이 고려를 침입했다. 봉산군을 함락시킨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공문을 보내 알렸다. “80만의 군사가 도착했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건국 75년 만에 고려에게 국운을 위협하는 심각한 국가적 재난이 찾아온 것이다.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던 당시의 국제정세
916년 나라를 세운 뒤 938년 ‘요(遼)’로 이름을 바꾼 거란은 당시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중원 전체를 장악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란은 960년 건국된 송을 압박하며 고려를 위협했다. 송과 거란의 대치상태에서 고려는 송과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했다. 발해에 대해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펴던 고려의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의 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건은 거란이 보내온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 보내고 함께 보낸 낙타 50필을 굶어 죽게 하는 등 반거란 정책을 분명히 했다.
왕건이 거란의 낙타를 굶겨 죽이던 942년, 서희(942~998)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종 대의 대쪽 재상 서필이었다. 집안도 좋았지만, 열아홉 살 되던 해 과거에 급제했고 과거 급제 후 차례를 뛰어 넘어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학문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송이 건국되던 해, 서희는 과거에 급제했고, 12년 뒤 내의성 시랑의 벼슬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962년, 965년 두 차례의 사신 교환이 있었지만, 한 동안 사신 왕래가 두절되었던 터라 쉽지 않은 길이었다. 처음에 송 태조는 이들을 반가이 맞아주지 않았다. 그 동안 고려가 아무런 외교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서희는 여진과 거란이 육로를 막고 있어 그간 외교 사절을 보내지 못했음을 설명했다. 서희의 예의바른 태도와 뛰어난 언변에 송 태조는 고려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조칙을 내려 광종에게 식읍을 더해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라는 벼슬을 내렸다. 명예직이기는 하나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젊은 시절부터 서희의 외교적 역량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서희는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거란 적장 소손녕의 협박, 투항론과 할지론으로 나뉘어진 고려
거란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의 성종은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해 막게 했다. 이들은 북계(현재의 평안북도 지방)에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방어할 준비를 서둘렀다. 성종도 친히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서경으로 갔다. 이 무렵 소손녕이 다시 공문을 보내왔다. “우리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귀순치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투항하라. 잠시라도 머뭇거리지 말라.”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압록강 하류 지역의 빈해여진과 그 중류지역에 있던 정안국을 멸망시켜버린 요였다. 송도 거란이 차지한 화북의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대패했듯이, 거란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자였다. 그러나 소손녕의 공문을 읽은 서희는 성종에게 “그들과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했다. 고려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군사를 동원했다면, 일단 치고 내려올 것인데 항복하라고 공문을 보내고 기다린다는 데서 뭔가 감지했던 것일까. 송과 대치중인 상태라 고려와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청했다. 제1차 협상이다. 이몽전이 침공의 이유를 묻자 소손녕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 만일 화의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하라.” 다시 한번 항복하라는 뜻을 전했을 뿐 성과 없는 회담이었다. 이몽전이 돌아오자 고려의 조정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거란의 요구대로 항복을 하자는 투항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화의를 청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었다. 무조건 항복하는 것보다는 땅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성종의 마음이 기울었다. 서경의 창고를 열어 비축해두었던 쌀을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고도 많은 쌀이 남자 적들의 군용으로 사용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때 서희가 나섰다. “지금 거란의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어주어야 하겠습니까?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건대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일전을 겨루게 한 뒤 그때 가서 다시 화친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전 민관(民官, 호조의 수장) 이지백도 이 말에 찬성했다.
고려의 조정이 이런 논의들로 바빠 회답이 늦어지자 소손녕은 다시 남하해 청천강 이남의 안융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때 대도수(大道秀)와 유방(庾方)이 거란군을 물리쳐 이겼다. 유목민족인 거란의 부대는 고려의 산악지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어려움을 느꼈던 듯하다. 소손녕은 더이상 진공하지 않고, 다시 항복을 독촉하기만 했다. 고려는 부랴부랴 합문사인 장영(張塋)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소손녕은 그보다 직급이 높은 대신을 보내라며 허세를 부렸다. 제2차 회담은 제대로 시도도 못해보고 실패한 꼴이었다. 성종이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거란 영문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장영이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대신을 불러 죽이려는 함정일지도 모르는 자리였다. 이때 서희가 자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성종은 개성 북쪽 예성강가까지 나아가 서희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전송했다.
거란과의 3차 회담, 서희가 나서다
그렇게 제3차 회담이 시작되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의 영문으로 갔다. 기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던 듯 소손녕은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뜰에서 절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거란의 군사가 가득한 적진에서 서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할 때는 절하는 것이 예법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소손녕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서희는 노한 기색을 보이며 숙소로 들어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은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린 자리였으나 서희는 한 나라의 대신으로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거란이 전면전보다 화의를 원하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동이었다. 결국 소손녕이 서로 대등하게 만나는 예식 절차를 수락하면서 첫 번째 기싸움은 서희의 승리로 돌아갔다.
서희와 소손녕은 마주서서 서로 읍한 후 당상으로 올라와 서쪽과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격적인 담판이 시작되었다. 먼저 소손녕이 물었다. “당신네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는데, 어째서 당신들이 침범하였는가?” 광종이 여진의 땅을 빼앗아 성을 쌓은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소손녕이 제기한 이 물음은 이번 정벌의 명분에 대한 얘기로 ‘누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서희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 한치의 틈도 없는 서희의 논리에 소손녕의 말문이 막히면서 고구려 후계론 논쟁은 일단락 지어졌다.
거란의 의도를 꿰뚫어본 서희의 외교술
마침내 소손녕이 정벌의 본래 목적을 얘기했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에 있는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까닭에 이번에 정벌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하리라.” ‘국교의 회복,’ 그러니까 송나라를 섬기지 말고 거란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송과 손을 잡고 있는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돌아 앉혀 혹시 있을 송과의 전면전에서 배후를 안정시키는 것, 그것이 거란의 본래 목적이었다.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어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았지만, 바로 그 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서희의 탁월함이다. 서희는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소손녕이 회담의 내용을 거란의 임금에게 보내자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했으니 그만 철군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는 데 동의한다는 답서도 보내왔다.
비록 그들의 요구대로 국교를 맺어 이후 일시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지만, 싸우지 않고 거란의 대군을 돌려보내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 삼아 영토까지 얻었으니 우리 역사상 가장 실리적으로 성공한 외교라 칭찬받을 만하다. 송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거란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한 안융진전투 이후 산악지대에서의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읽어낸 통찰력, 논리 정연한 언변,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듬해부터 서희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낸 뒤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 등의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서희는 평장사를 거쳐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되었으나 996년(성종 15)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오랫동안 치료와 요양을 했다. 이때 성종이 직접 문병을 와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사원에 나누어주고 개국사에는 곡식 1천 석을 내렸다. 개국사에서 요양하던 서희는 998년(목종 원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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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연구원 / 서희 동상
경기도 여주군 / 서희 묘
설봉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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