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대(臨鏡臺)
임경대(臨鏡臺)는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의 화제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정자이다.
일명 고운대(孤雲臺), 최공대(崔公臺)라고 하는데, 황산강(현 낙동강의 옛이름)서쪽 절벽 위에 있다.
벽에는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래 되어 조감하기 어렵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시만 전할 뿐이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시대의 학자이며 경주최씨의 시조이다.
868년에 12세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874년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漂水縣尉'라는 벼슬을 받았다.
879년 황소의 난때에는 반란자를 치기 위해 선동하는 글인 '토왕소격문'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당대 명필가로 글씨를 잘 썼으며 신라 최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라고 표기해야 할지...원동의 경계선 안에 있는데 오봉산 능선 부근의 임경대는 물금리에 있다는 네이버지도의 표기는 원동면 화제리로 표기해야할까..
황산강 동쪽 절벽 위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오봉산 서쪽 절벽위라고 하든지..
적색선은 원동면의 경계
<최치원(崔致遠)이 임경대를 노래한 시>
연기 낀 봉우리 빽빽하고 물은 넓고 넓은데
연만족족수용용 烟巒簇簇水溶溶
烟연기연, 巒뫼만, 簇모일족, 溶물질펀히흐를용
물 속에 비친 인가 푸른 봉우리에 마주쳤네.
경이인가대벽봉 鏡裏人家對碧峰
裏속이
어느 곳 외로운 돛대 바람 싣고 가노니
하처고범포풍거 何處孤帆飽風去
帆돛범, 飽배부를포
아득히 나는 저 새 날아간 자취 없네
번연비조묘무종 번然飛鳥杳無踨
瞥깜짝할별,침침할폐, 杳아득할묘(요), 踨자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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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대」 최치원 [ 臨鏡臺 崔致遠 ]
煙巒簇簇水溶溶(연만족족수용용) 내 낀 봉우리 웅긋쭝긋, 물은 출렁출렁
鏡裏人家對碧峯(경리인가대벽봉) 거울 속 인가는 푸른 봉우리를 마주 했네
何處孤帆飽風去(하처고범포풍거) 외로운 돛단배는 바람을 안고 어디로 가는가
瞥然飛鳥杳無蹤(별연비조묘무종) 별안간에 나는 새처럼 자취 없이 사라졌네
<감상>
이 시는 황산강에 있는 임경대에서 바라본 풍경을 노래한 시이다.
멀리 안개 속에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강물은 넘실대며 흘러가고 있다. 마침 황산강 위로 돛단배 한 척이 바람을 가득 안은 채 가고 있는데,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날아가는 새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대하고 있는 듯 '시중유화(詩中有畵)'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김종직은 『청구풍아』에서 "참으로 소리가 있는 그림이다(眞有聲之畵(진유성지화))."라고 평하고 있다.
<주석>
[臨鏡臺(임경대)] 경상남도 양산군 황산강(黃山江) 동북쪽에 있음. 최치원이 놀고 즐기던 곳이라 하여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함.
[巒] 산 만, [簇] 모이다 족, [溶] 성한 모양 용, [帆] 돛단배 범, [瞥] 잠깐보다 별, [杳] 아득하다 묘, [蹤] 자취 종
각주
1 최치원(崔致遠, 857, 문성왕 19~?): 자(字)는 고운(孤雲)·해운(海雲). 6두품 출신으로,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876년(헌강왕 2)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879년 고변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였으며, 「격황소서(檄黃巢書)」는 명문(名文)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왔는데,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 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지역을 유람하다 만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갔으며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唐書)』 「열전(列傳)」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경대」 최치원1) [臨鏡臺 崔致遠] (고려시대 한시읽기, 2009. 10. 15., 한국학술정보(주))
낙동강 자전거길 임경대 가는 길
자전거는 용화사에다 두고
계단을 밟고 한참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서는 또 약간 오르면
정자 하나...
최치원이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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