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산의 용굴
이번 내장산 산행에서 아쉽게 놓친 용굴..
현지의 안내라고는 내장사 후문의 이 초라한 안내만 보았을 뿐이다.
하산길은 까치봉에서 잘 잡고 시간도 있었는데....
용굴[龍窟]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 금선계곡에 있는 동굴
용이 승천하였다는 곳으로 암자가 있었던 천연동굴. 임재왜란때 조선왕조실록과 조선태조 영정을 1년 1개월동안 보관하였던 곳이다.
길이 8m, 높이 2~2.5m에 이르는 동굴이다. 내장산국립공원 내장사에서 금선계곡을 따라 1.5k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용굴이 나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7월 태인현 출신의 손홍록(孫弘祿)과 오희길(吳希吉)이라는 선비가 전주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태조의 영정과 왕조실록을 이 동굴로 옮겨 3개월 동안 지켰다고 한다. 그 후에는 이곳보다 더욱 험준한 곳에 있던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전해진다.
용굴을 지나 금선계곡을 거슬러 더 올라가면 기름바위, 신선문, 금선폭포를 거쳐 내장산의 최고봉인 신선봉(763m)에 이르게 된다.
금선폭포는 비탐방구간이라 들어 갈 수 없다.
임란때 왕조실록 보관터 내장산서 확인
2013-06-24서울신문
자기·배수시설 등 유물 발견
전북 정읍시는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을 보관했던 내장산 터를 확인했다고 24일 밝혔다. 터가 확인된 곳은 용굴암과 은적암, 비래암 등 3개의 작은 암자가 있던 곳으로 이들 터는 문헌에는 나와 있지만 그동안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다. 용굴암과 은적암은 계곡을 끼고 있는 내장산의 아래쪽, 비래암은 중턱 근처이며 모두 사람이 드나들기 어려운 험난한 곳이다.
현장에서는 조선시대의 자기, 기와 파편과 함께 온돌, 배수시설 등의 유물이 나왔다. 박대길 관광산업과 담당은 “온돌과 배수시설은 실록과 어진을 습기로부터 보존하려는 시설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각종 문헌에는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왜적으로부터 지키고자 당시 전라감사 이광 등이 내장산 용굴암 등으로 옮겨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읍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625009008#csidx57f735e44bc5956978d390f5d261ac6
용굴의 위치 확인
용굴
* 태조의 영정과 왕조실록을 지켜낸 동굴 *
내장산국립공원 내장사에서 금선계곡을 따라 1.5k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우측 산 중턱에 용굴이 나온다. 금선계곡 오른쪽에 위치한 용굴은 가파른 철재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당시 조선왕조실록 이안과정을 재조사 과정에 전주사고에서 난을 피해 정읍의 유생들인 오희길과 손홍록은 전주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의 영정을 내장산 용굴로 옮겨 3개월 동안 지켰다. 후에는 이곳보다 더욱 험준한 곳에 있던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전해진다.
*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8백여 권의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은 정읍사람 안의와 손홍록이 없었더라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태워져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국가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서고인 사고는 경복궁내 춘추관,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 충청도 충주 4곳에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4곳의 사고가 모두 불타버렸지만,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8백여 권의 조선왕조실록은 불태워지기 전 내장산의 은봉암과 용굴에 피신시켜 지켜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왜군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기 집안의 머슴들을 이끌고 전주까지 달려가 전주사고의 참봉인 유신, 오희길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목숨을 걸고 내장산 깊은 곳 은봉암과 용굴 까지 피신시킨 것이라 한다.
은봉암은 내장산 금선폭포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현재 전하지 않으며 용굴(龍窟)은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 금선계곡에 있는 동굴로 길이 8m, 높이 2~2.5m에 이른다.
===============================================================================
내장사(內藏寺)
내장사內藏寺는 백제 무왕37년(636)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0여동의 대가람(大伽藍)을 세우고 영은사(靈隱寺)라 부른 이래 조선 중종 34년(1539) 사찰철폐령에 따라 불태워졌는데 이후 명종 22년(1567) 희묵대사(希默大師)가 법당을 짓고 정조 3년(1779) 영담대사(映曇大師)가 대웅전을 중수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근세에는 백핵명선사(白鶴鳴禪師)가 절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어느 때부턴가 영은사(靈隱寺)를 내장사(內藏寺)로 부르게 되었다.
한국전쟁때인 1951년 1월 12일 불에 탄 것을 1958년 주지(住持) 다천(茶泉)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1971년 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사찰 복원 사업이 이루어져 오늘날 내장사(內藏寺)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신선폭포
신선제는 내장산성에 있는 제방으로 승군과 왜군이 싸웠던 역사적 장소이다.
제방 근처에 자연석을 쌓아 폭포를 조성하고 신선폭포라 이름하였다.
========
서보단사적비(誓報壇事績碑)
내장산의 내장사(內藏寺)로 오르는 길목에 서보단(誓報壇)사적비와 서보단기념탑이 서 있다.
1903년 7월 15일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 10월 발생)을 규탄하는 항일집회인 호남유림대회가 내장산에서 열렸다. 무성서원이 호남지역 향교에 보낸 통문을 전달받고 결집한 유림 총 54명은 내장산 벽련암에서 모여 단(檀)을 쌓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복수를 맹세하였으며, 해마다 추모제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그때 쌓은 단을 서보단 또는 영모단(永慕壇)이라 하였다.
서보단사적비는 1991년 서보단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건립하였고, 서보단기념탑은 1995년 8월 12일 건립하였다. 높이 4.3m의 기념탑에는 1903년 호남유림대회에 참가한 이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서래봉(西來峰, 624m)
내장산 9봉 중 가장 경치가 뛰어난 봉우리로, 약 1km에 걸쳐 이어지는 바위 절벽이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정상에 서면 내장산의 봉우리들이 장쾌하게 펼쳐지고, 내장사(內藏寺)와 벽련암(碧蓮庵, 벽련사)의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서쪽으로는 내장저수지와 정읍시가지 일부가 보인다.
서역(西域)에서 온 달마대사가 내장산에서 입산수도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와 ‘서래봉(西來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서래봉은 써래봉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농기구 써레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내장사 일주문에서 시작하여 벽련암-서래봉-불출봉-원적암-내장사를 거쳐 다시 일주문으로 돌아오는 5.65km(약 4시간)의 등반코스가 있다. 서래봉은 내장산 봉우리 종주코스 즉 서래봉-불출봉-망해봉-연지봉-까치봉-신선봉-연자봉-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코스의 백미이기도 하다.
=======
불출봉(佛出峰,622m)
서래봉 서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내장저수지와 정읍시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내장산최고봉인 신선봉을 비롯한 7개의 봉우리가 한 누에 들어오는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전설에 의하면 불츨봉에 안개나 구름이 끼면 그 해 가뭄이 계속된다고 한다.
========
망해봉(望海峰,679m)
망해봉은 불출봉과 연지봉 사이의 봉우리로서, 내장산 안쪽의 먹뱀이골 및 바깥쪽의 정읍시가 발밑에 잘 보이며 맑은 날이면 정상에서 서해를 조망할 수 있다.
=======
연지봉(蓮池峰,670m)
일명 연오봉이라 부르며 망해봉에서 서남쪽으로 솟아로른 봉우리이다.
이 곳에서 발원하는 물은 원적계곡을 타고 흘러 금선계곡과 합류하여 서래봉을 돌아 내장호를 이루며 동진강 줄기의 근원이 된다.
예로부터 연지봉에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까치봉(717m)
내장산 서쪽 중심부에 2개의 바위봉우리로 바위 형상이 까치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까치봉이라 한다.
내장산의 제2봉으로서 백암산을 연결하는 주봉이며, 내장 9봉이 까치봉을 중심으로 동쪽을 향해 이어지면서 말굽형을 이루고 있다.
======
신선봉(神仙峰,763m)
내장산 최고봉으로 경관이 수려하고 내장9봉을 조망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선유하였으나 봉우리가 높아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 신선봉이라 불리운다.
봉우리 아래 계곡 산벽에 유서깊은 용굴과 금선폭포, 기름바위, 신선문 등이 있고, 남쪽으로 구암사로 통하며 그 너머로 백양사에 이른다.
========
연자봉(燕子峰,675m)
풍수지리상 서래봉 아래 벽련암을 연소(제비의 보금자리)라 부르는데, 이 봉우리와 벽련암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 연자봉이라고 부른다.
대웅전 앞에서 연자봉을 바라보면서 글을 쓰면 좋은 문장이 나오며 일류 명사로서 입신출세 한다는 전설이 있다.
===========
장군봉(將軍峰,696m)
이 봉우리는 추령에서 연자봉 중간에 솟아 있는 급경사의 험준한 봉우리로 수목이 울창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승병대장 희묵대사가 이 곳에서 승병을 이끌어 활약했다고 하여 장군봉이라 불리운다.
산정에는 지휘대가 있고 이 곳을 장군대, 또는 용바위라고 한다.
=======
유군치(留軍峙)
이 고개는 북쪽의 내장사 지구로부터 순창군 복흥면을 거쳐 남쪽의 백양사 지구로 연결되는 길목이다.
임진왜란 때 순창에 진을 치고 공격해오는 왜군을 승병장 희묵대사가 이 곳에서 머무르며 유인하여 크게 물리친 사실이 있어 유군치라 유래 되었다.
=================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 북구 소개 안내판에서 (0) | 2017.02.28 |
---|---|
조선왕조실록 내장산 이안사적기 (0) | 2017.02.27 |
내장산의 서보단 사적비 (0) | 2017.02.26 |
수우당 최영경 (0) | 2017.02.24 |
대원사 티벳박물관 (0) | 2017.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