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서운산
20140503 토
산행코스 : 청룡사주차장부근 - 바우덕이사당 - 되돌아나와서 청룡사 - 갈림길(오른쪽) - 은적암 - 사거리 - 좌성사 - 석조여래입상 - 탕흉대 - 서봉 - 헬기장 - 삼거리 - 정상 - 삼거리 -능선삼거리 - 마애석불 - 석남사 - 주차장
* 은적암에서 탕흉대로 먼저 갔다가 다시 좌상사로 내려가서 사잇길로 이동하여 약간 수정되었지만 거의 대부분을 정상으로 갔다.
11:36 청룡사주차장
11:38 청룡사 부도탑들
11:42-45 바우덕이사당
11:52-12:00 청룡사
12:05 은적암 안내 입간판(신라시대 창건, 태조왕건 3일간 은거)
12:30 은적암, 감로수
12:35 중식(모여서)약30분
13:50 탕흉대
13:57 서운산성, 서운북산리 석조여래입상
14:00-09 좌성사
14:42-50 서운산 정상
15:18 마애석불
15:27-38 석남사
16:00 석남사주차장
9.3km/4:23 (GPS 기록)
서운산은 300대 명산에 포함되어 있다.
산보하는 느낌으로 천천히 돌아 구경꺼리들을 챙겨 보았다.
청룡사 입구에서 우측으로 조금 가면 바우덕이사당이 있다.
바우덕이는 100년 전 남사당패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청룡사, 은적암, 탕흉대, 좌성사, 정상, 마애석불, 석남사 등을 차례로 돌아보고 16:00에 하산했다.
인상 깊게 살펴본 식물 중에 족두리풀꽃이 있었다. 잎이 두 장 정도된 것에서는 꽃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4장 이상 정도 된 것에서 꽃을 본 것 같다.
천남성도 몇 포기 보이고 그 외에도 몇 가지 꽃들이 있어 사진으로 담아왔는데 대부분은 흔히들 보는 것들이다.
함께 가면서 설명해줄만한 가이드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요즘은 독학으로 해결하는 방법을...덕분에 책이 늘었다.
산행 종료하고 이동하여 안성마춤박물관을 관람했다. 안성유기에 관한 자료들과 안성시의 역사에 대한 설명들 모두 유익한 이야기들이었다.
오늘의 산행은 내게 부담도 없고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을 해결해주는 즐거운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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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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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산성[瑞雲山城]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북산리와 청룡리의 서운산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경기도 기념물 제81호. 둘레가 600m 정도인데, 지금은 너비 2m이고 높이가 1m쯤 되는 토루가 약 300m 남아있다.
남문과 북문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성안에 높이가 2m이고 너비가 1m의 석불이 있고, 남문터 아래로 근래에 세운 약천암과 토굴암이 있으며, 동남쪽 1km쯤 아래엔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 홍계남(洪季男)과 이덕남(李德男) 장군이 왜군을 격퇴한 엽둔령(葉屯嶺)이 진천군과의 경계인데, 홍계남이 서운산 정상에 쌓은 성을 우산성(右山城)이라 하고, 덕봉리 앞산에 이덕남 장군이 쌓은 성을 좌산성(左山城)이라고도 한다.
기록에는 서운고성의 둘레가 3리라 하고, 금강고성을 둘레 5리라 하였다. 산 아래에 홍계남 장군이 싸운 곳에도 토성이 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운산성 [瑞雲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홍계남[洪季男]1563년(명종 18) ~ 1597년(선조 30) 조선시대 수원판관, 영천군수, 첨지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지금의 화성). 수원 출생.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이다. 용력이 뛰어나고 말달리기·활쏘기를 잘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었다. 1590년(선조 23)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의 군관으로 선발되어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일행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관직으로는 경기도조방장, 충청·경상도의 조방장, 수원판관·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인근의 여러 고을로 전전하며 전공을 세워 첨지(僉知)로 승진되었다. 그가 다른 진에 연락차 본진을 떠난 사이 아버지가 왜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자, 돌아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의병진의 선두에 서서 높은 곳에 성을 쌓고 적정을 정탐하면서 도처에서 유격전도 펼쳤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전라·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이빈(李蘋)·선거이(宣居怡)·송대빈(宋大斌) 등과 함께 운봉·남원·진주·구례·경주 등지로 전전하며 전공을 세웠다. 그 뒤 1596년에는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계남 [洪季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덕남[李德男](생년미상 ~ 1592년(선조 25)) 조선시대 훈련부정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윤보(潤甫). 아버지는 참봉 이수인(李守訒)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부정이 되었다.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삼촌인 홍자수(洪自修)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농가에 있는 농구를 녹여서 무기를 만들어 왜적에 대항하였으며, 적병이 지나가는 모령(毛嶺)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병이 이르자 크게 무찔러 이겼다. 그 뒤 기호·호서 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활약하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덕남 [李德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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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산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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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흉대(蘯胸臺)
한서(漢書)에 나오는 求之蘯蘯 如繫風捕影 終不可得(구지탕탕 여계풍포영 종불가득, 탕을 구하는 것은 바람을 계류하고 그림자를 포박하려 하는 것과 같아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다)를 인용하여 탕흉대의 ‘탕’을 설명하고,
장자(莊子)에 나오는 喜怒哀樂 不入於胸次(희로애락 불입어흉차, 희로애락의 감정이 가슴에 일어나지 않는다)를 인용하여 ‘흉’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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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덕이사당
바우덕이는 안성 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이면서 한국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인물이다.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으로 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성장하면서 재주를 익혀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15살 때 당시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꼭두쇠)이 사망하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여성의 몸인 바우덕이를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우덕이는 여성 꼭두쇠라는 특성과 탁월한 기예로 안성 남사당패를 최고의 인기패로 육성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건 공사 때 인부들을 위로하고자 전국의 남사당패를 불러들였는데 이때 안성에 거주하던 이승지의 후원으로 바우덕이 패와 안성 돌우물 패가 최고의 인기를 얻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살던 곳은 청룡사가 위치한 불당골인데 이 곳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이 곳 남사당패는 청룡사의 신표를 받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23세 때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마지막에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망인의 유지에 따라 청룡골 입구 개울가 양지 바른 곳에 매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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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 서운산 산행 2014050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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